사찰

구례 화엄사

승학2 2018. 11. 19. 21:00

화엄사(華嚴寺)

사적 제505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 절로써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754(경덕왕 13) 황룡사(皇龍寺)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 되어있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서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한다. 그뒤 신라말 이곳에서 출가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

 

고려 광종대에는 홍경선사(洪慶禪師)가 당우와 암자를 중축했으며, 인종대에는 정인왕사(定仁王師)가 중수했으며, 충숙왕대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1424(세종 6)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때에 불타 없어진 것을 1630(인조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중건하기 시작하여 7년만인 1636년 대웅전과요사채 등이 완공되었다. _출처 : 브리태니커사전

 

남악사(南岳祠)

전남 문화재 자료 제36

 

지리산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지리산은 삼국시대부터 오악(五岳)중 하나인 남악(南岳)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다. 신라때는 천왕봉에서 고려때는 노고단에서 산신제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부터는 한양에서 파견된 제관에 의해 남악사에서 제사를 지냈다. 원래는 온당리 당동(구례군 광의면)에 있었는데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헐렸던 것을 1969년에 이곳에 다시 세웠다. 현재는 매년 곡우(420일경)에 약수제란 이름으로 민속행사와 함께 제례를 올려 그 맥을 잇고 있다._출처: 화엄사

 

일주문

조선 인조18(1640)에 벽암선사가 중건했고 고종3(1866) 주지 지선스님과 도감회성스님이 연목과 부연보수  1919년에 주지 진응스님이 도리일부  부연  연목보수하면서 지리산화엄사조계문중수연기(智異山華嚴寺曺溪門重修緣起)을 쓰고 상량에 넣었다. 1998년 종걸스님이 보수 하였다. 편액은 선조대왕의 네 번째 부인의 넷째아들 의창군의 글입니다._출처: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의 탑비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_출처: 화엄사.

화엄사 성보박물관 전경

 

 

 

돌사자상

이 돌사자상은 1930년대에 도쿄 영친왕(英親王:1897-1970) 신축 저택을 장식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구례 화엄사 사사자(四獅子) 삼층석탑(국보 제35)의 서남쪽 돌사자상을 모방하여 일본인 조각가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제작하였다. 이후 1954년 영친왕 저택이 매각되면서 전(() 일본 중의원 의장 호시지마 니로(星島二郞)에게 양도 되었고 1959년 호시지마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하여 이 조각을주일 한국대표부 현주일대사관에 기증하였다. 주일한국대사관에 보관 중이던 이 상은 10132월 국내로 이관 되었고  문화재청에서 구례 화엄사에 관리를 위탁함에 따라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다._출처: 화엄사 

 

 

 금강역사

문수.보현동자상

 

금강역사(金剛力士)는 절을 수호하는 신장(神將)으로 2구 한 쌍이며 인왕(仁王)이라고도 불리운다. 인왕상의 옆에는 문수(文殊)와 보현(寶賢)보살이 동자모습으로 각각 사자와 코끼리 위에 앉아 있다. _출처: 화엄사

 

 만월당(滿月堂)

인조 13(1635) 벽암스님이 중건한 만월당은 대중 스님들이 만월지상(滿月之相: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을 말함)인 모습으로 지내는 전당입니다._출처 화엄사

 

 

 

운고각(雲鼓閣)

운고각은 1918년 금정암에 계시는 세월(世月)비구니께서 중건하시고 1976년 명선(明煽)스님이 범종각(梵鐘閣)을 세우면서 운고각을 해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종삼(宗三)스님이 20101021일 운고각을 헤체하여 신축불사 중건하였으며  20126월에 운고각 단청불사 및 운고루(雲鼓樓) 현판을 달았다.출처: 화엄사

범종각(梵鍾閣)

화엄사에 3층 누각의 에밀레종 버금가는 정도로 무게가 20톤이나 데는 신라화엄대종(新羅華嚴大鐘)이 있었는데 정유왜란때 왜병이 종을 갖고 가다가 용두리 앞 섬진강에 빠트렸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범종각은 19761128일 준공과 더불어 타종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종의 이름은 화엄사가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는 곳이니 지혜를 범어로 반야라 합니다. 그래서 반야범종(般若梵鍾)이라고 부름니다. 명선스님이 건립했다.출처: 화엄사

보제루(普濟樓)

지방 유형문화재 제49

 

화엄사는 보제루에도 특별함이 숨어있다.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용인 2층 누각 건물로 대개는 그 밑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서게 되지만, 화엄사의 보제루는 1층의 기둥 높이를 낮게 만들어 옆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각황전 대웅전 대석단 등이 장엄하게 펼처지는 중심 영역의 경관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장식을 배제하고 단청도 하지 않아 절제된 아름다음을 느낄수 있다. 이건물은 1636년에 건립된 것이다._출처:화엄사.

 

 

 오층 석탑(東五層 石塔)

보물 제132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있다. 그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탑으로 크기는 비숫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방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단정하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단인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층 몸돌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서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올려 놓았다. 이탑은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단 기단인데 비해 1단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 경으로 짐작된다._출처 문화재청

 

서오층 석탑(西五層 石塔)

보물 제133

 

화엄사 대웅전 앞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5층 석탑으로 높이 640cm2중기단 (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 각면에는 안상(眼象)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으로는 2층의 단이있는 받침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인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려석이 놓여있다. _출처 문화재청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299호

 

화엄사에 있는 조선중기의 목조 건물로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내외3출목으로 외부에는 쇠서[牛舌] 끝이 잘려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첨차(山彌檐遮)는 초화형(草花形)으로 장식되는 등 조선중기 목조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에는 정자무늬와 빗살무늬로 된 삼분합(三分閤)이 달려 있으며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두어 건물이 높은 편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을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외둘레간보다 한층 높게 만들었다. 불단 뒷면과 좌우에는 각각 2, 3개의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으며, 불단위에는 비로나자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1757년(영조 33)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다. 이 불상 위로는 각각 J자형의 처마로 된 정교하고 장식적인 닫집이 있다.

 

적묵당

1632(인조 10)에 벽암선사께서 중수한후 수차례 중수와 보수를 하여 지금은 사교반 강의실로 사용한다._출처: 화엄사

명부전(冥府殿)

인조 8(1630) 벽암스님이 중건한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十王)을 모신 전당입니다.

 

 

영전(影幀)

본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둥전,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했던 전각 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면서 연기조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국선사등 화엄사의 역대조사  선사  대사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전각이다. 조선 인조 10년(1632)때 벽암선사가 중건하고 헌종 2년(1836)에 선일(선일)스님이 보수한 후 여러차례 보수와 개조한 전각이다._출처 화엄사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

국보 제67호

 

각황전은 원래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한 3층 장륙전으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봉안했으며, 사방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엄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수되었는데 이때 건물의 일부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조기단 위에 서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평주이며 기둥머리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여있다. 평방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多包系)이며 상하층 모두 내외 2출목으로 되어 있다. 첨차는 아랫면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쇠서의 끝이 모두 위로 올라가 활처럼 생겼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 초기 목조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층 앞면에는 빗살무늬와 솟을살무늬로 장식된 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일부만 벽으로 막았다. 2층은 사방에 모두 작은 창을 달았다.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공간이 넓으며 고주(高柱)를 사방에 배치하고 그 위에 대들보로 종량(宗樑)의 한쪽 끝을 받치고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 경사진 빗반자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중앙의 뒤쪽으로는 대불단 위에 석가모니불·아미타불·다보불(多寶佛)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知積菩薩)이 있다.

이 불상, 보살상들은 3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도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기(腹藏記)에 의해 1703(숙종 29)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불단 밑에는 임진왜란 때 파손된 1,500여 점의 석경이 봉안되어 있다._출처:다음백과. 브리태니커사전

 

 

원통전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 칠성  독성  산신이 모셔져 있으며 또 법당에 부휴집(浮休集), 염불직지(念佛直指)등 많은 귀중한 목판본이 보관 되어있다. 조선 숙종 29(1703) 계파선사께서 중건했고  1978년에 명선스님이 해체중수 했 으며  1997년에 종열스님이 관세음보살상을 개금 하였으며 2006년에 10월 종삼스님 기와변와 하였다. 편액은 정조23(1799)에 조종현에 의해 쓰어진 것이다._출처: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華嚴寺圓通殿前獅子搭)

보물제300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4사자 감로탑은 신라 문무왕17(677)에 조성한 것이며 4사자의 표정은 인간의 감정인 희노애락(기쁨,성냄,슬픔,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뜻하며  사자의 표현은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 또는 감로법(甘露法)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그러므로 이 석탑은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여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 연화장세계로 이끌어 주는 감미로운 탑이라 할 수 있다20072월에 주지 종삼스님이 이끼제거를 하여 탑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공사를 하였고 다시금 20122월에 4사자 감로탑 해체보수및 보존처리공사를 했다._출처: 화엄사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華嚴寺覺皇殿-石燈)

국보12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통일 신라시대 것으로 기단부. 화사석(火舍石). 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8각석등으로 현존한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전체 높이 636m로 가장크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위에는 귀꽃이 장식된 8엽의 복련을 돌렸으며 연화대 위에는 다시 구름무늬와 8각 굄이 있다. 간주석은 고복형으로 전형적인 팔각석등과는 약간 다르며, 배가 볼록하게 나온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는데 그 위에 8개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실상사석등·선림원지석등·임실용암리석등·개선사지석등(891) 등 전라도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상대석의 밑에는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위에는 8각의 소로형 굄이 있다. 화사석은 4면에 화창을 내었으나 다른 면에는 아무런 장식문양도 없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각 모서리에는 직립한 귀꽃 장식이 크게 표현되었으며 추녀는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높은 노반  앙화  보륜  귀꽃이 장식된 보개를 차례로 얹고 정상에는 다른 석탑과 마찬가지로 높은 간주가 달린 보주로 장식했다. 이 석등은 기단보다 상륜부가 크고 폭이 넓어 비례가 맞지 않고 조각수법도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장중함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_출처: 다음백과. 브리태니커사전.

 

 

화엄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분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신 전각으로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합니다. 인조 10(1632) 벽암선사께서 중건하였는데 정조조(正祖朝)에 화재로 소실된 후 정조 19(1795)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하였다._출처: 화엄사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

 

각황전 왼편 동백숲 사이로 난 108계단을 오르면 효대(孝臺)라 불리는 높은지대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높이 5.5m의 사사자삼층석탑은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多寶塔)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자장율사가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한다. 이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으나 상층기단이 사자상으로 되어 있는 이형석탑에 속한다. 지대석 위에 3단의 높은 굄이 하층기단을 받치며 하대석의 각 면에 우주를 조각하고 그 사이에 안상을 3구씩 배치했으며 안상 안에는 천인상을 조각했다. 알맞은 체감비율과 옥개석의 경쾌한 반전  4마리의 사자를 사방에 배치한 점  하층기단 및 1층 옥신의 뛰어난 조각수법 등에 의해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_출처:다음백과. 화엄사

화엄사사사자앞석등(華嚴寺四獅子_石燈)

전체적으로는 신라석등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따르면서 간주석(竿柱石)을 공양상으로 대치한 것이 특이하다지대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방형의 형태이다. 하대석은 8각형으로 복엽 8판의 복련(伏蓮)을 조각하였다. 간주석은 3곳에 8각형의 석주를 놓고 정상에 복엽 8판의 연화문대가 있는 8각형의 옥개석을 놓았다.

이같은 간주부(竿柱部)의 내면에는 석탑을 향해 공양(供養)하는 모습의 상()이 배치되어있다. 이 상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緣起祖師)라 불리고 있다. 통견 법의를 입고 있는 공양상의 오른발은 무릅을 꿇고 왼발 무릅을 세웠다. 아울러 오른손은 꿇은 무릅 위에 놓고  왼손은 왼발의 무릅위에 받치고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상호(相好)는 둥근 형태로 눈...귀의 조각이 뚜렷하다.

상대석은 8각형의 평면으로  단옆 8판의 양련이 조식되어 있다. 화사석 역시 8각형인데  4면에 화창(火窓)이 개설되어 있다. 8각형의 옥개석 역시 전형적인 신라석등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정상에는 연봉형의 보주를 놓았다. 이석등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수법으로 조성된 석등으로는 강원도 화양군에 있는 금잔암석등을 들 수 있다._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엄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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