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9

대릉원과 첨성대

대릉원(大陵苑) 사적 제512호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이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총면적은 약 600,423㎡(181,627평)로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등의 무덤 50기가 모여 있다. 본래 사적38호 경주노동리고분군, 사적39호 경주노서리고분군, 사적40호 경주황남리고분군, 사적41호 경주황오리고분군, 사적42호 경주인왕리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어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신라 미추왕릉(新羅 味鄒王陵) 적 제175호 경주시 황남동 89-2 성은 김씨(金氏)이며 미조(未祖, 未照)..

신라왕릉 2019.09.02

경덕왕릉

경덕왕릉(景德王陵) 사적 제23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외 경덕왕의 이름은 김헌영(金憲英)이며 신라 33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능은 신라 35대 경덕왕(재위:742~765)을 모신 곳이다. 구릉 경사면의 흙을 평평하게 깍아 축조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面石)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撑石)을 교대로 세웠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경덕왕조에 “모지사(毛祗寺) 서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고 전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에 “처음에 경지사(頃只寺)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뒤에 양장골 가운데에 이장했다”고 전한..

신라왕릉 2019.09.01

삼릉과 경애왕릉

경주 배동 삼릉(慶州 拜洞 三稜) 사적 제219호 경주시 배동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재위 당시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으며, 이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또한 왜(倭)에서는사신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재위 중에는 견훤(甄萱)과 궁에(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전력하였다. 능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능의..

신라왕릉 2019.07.28

헌강왕릉 정강왕릉

신라 헌강왕릉(新羅 憲康王陵) 사적 제187호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약 4m, 지름 약 15m로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내부는 연도(羡道)가 석살의 동쪽벽에 치우쳐 있는 구조로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동서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割石)을이용하여 천장으로 갈수록 둥글게 모아지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cm, 너비 128∼96cm이다. 석실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屍床石)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만들어 졌다..

신라왕릉 2019.07.28

경주 오릉

숭덕전(崇德殿) 경북 문화재자료 제254호 경북 경주시 탑동 77번지 알영정(閼英井)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다. 옛 문헌에는 알영정이 경주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영정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으며 우물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알영은 자라면서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추었는데 시조왕께서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아 들렸다. 알영왕비는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두 성인(二聖)이라 불렸다고 한다._출처: 경주시

신라왕릉 2019.06.09

지마왕릉 및 포석정

신라 지마왕릉(新羅 祗摩王陵) 사적 제221호 경주시 배동 30 이 능은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 재위 112∼134)을 모신 곳으로 남산 서쪽 아래에 있다. 이능은 밑 둘레 38m, 높이 3.4m로 흙을 둥굴게 쌓아 올린 형태이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지마왕은 파사이사금(破娑王) 아들로 성이 박씨(朴氏)다.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왕후는 김씨(金氏) 애례부인(愛禮夫人)으로 갈문왕(葛文王)마제의 딸인데 아들이 없었다.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왕릉 앞에 잘 다듬어 놓여있는 돌은 1955년에 설치한 것으로 영혼이 너와 놀게하기 위하여 설치한 한다는 혼유석(魂遊石)이다. ※.갈문왕이라는 호칭은 스스로 부른것이 아니라 6부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

신라왕릉 2017.10.04

일성왕릉 주변 신라 양산재와 나정

신라 일성왕릉(新羅 逸聖王陵) 사적 제173호 경주시 탑동 산23 이 능은 신라 제7대 일성왕(재위 134∼154)을 모신 곳이다. 경주 남산의 북쪽인 해목령(蟹目領)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이 약 16m, 높이 약 5m이다. 일상왕이 성은 박씨(朴氏)이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祗摩王)의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민간에서 금은주옥(金銀珠玉)의 사용을 금지하는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봉분 아래쪽에는 호석(護石)으로 보이는 자연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으며, 봉분 내부에는 돌방 (石室)이 있을 ..

신라왕릉 2017.10.03

탈해왕릉과 표암

신라 탈해왕릉(新羅 脫解王陵) 사적 제174호 경주시 산업로 4152-10(동천동)부근 이 능은 신라 제4대 탈해왕(제위 57∼80)을 모신 곳이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倭國)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비가 잉태한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 그 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거두어 키웠다. 이때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 왔으므로 까치작 (鵲)에서 새조 “鳥”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고 궤를 풀고 나왔다해서 이름을 탈해라 지었다. 석탈해는 62세때 왕위에 올랐으며 치세는 23년 이었다. 세상을 떠났을 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왕릉 2017.09.27

원성왕릉 및 주변 유적

신라 원성왕릉(新羅 元聖王陵) 사적 제26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제위 785∼798)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12㎞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로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돋을 새김되어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좌우에 화표석, 문인석(文人石)과 돌사자(石獅子)를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등 모든 면에서 신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

신라왕릉 2017.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