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大興寺)
사적제 508호 명승 제66호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가람배치는 북원, 남원, 별원으로 구성되어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과 응진당, 삼층석탑(보물 제320호)등이 있고, 남원에는 천분의 부처님(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을 모신 천불전(전남 유형문화재 제48호)과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등이 있으며, 별원에는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그리고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등의 성보문화제가 있다.
또한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명승 제66호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식생경관이 뛰어나고, 도솔봉, 혈망봉, 고계봉, 기련봉등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려져 절경을 이루며,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대흥사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경지로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제42차 새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1천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 7곳(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해남 대흥사)가운데 하나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출처: 대흥사 및 브리테니커
연리근(連理根)
수령약 500년 된 느티나무로 전남에서 2012년1월 27일 보호수(지정번호: 15-14-2-9)로 지정 한것으로 가까이 자라는 두나무가 서로 합쳐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부릅니다.-출처 : 대흥사
백설당(白雪堂)
북원 일곽의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체이다. 대웅전 중정의 서편을 가로막아 널찍하게 자리잡은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사중의 대중방으로 이용된다.
동변 처마 아래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과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 두기의 편액이 걸려있다.
1899년(광무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건물인 대중방은 절안의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출처: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전남 유형문화재 제296호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불존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뒤에 있는 탱화는 1901년 대한제국 광무 5년에 조성한 것이다.
이 건물은 1667년 조선현종 8년에중건된 적이 있지만, 1899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 장식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썼다. -출처: 대흥사
응진당.산신각(應眞堂.山神閣)
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 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것이 특이하
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이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이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응진당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 판관. 사자. 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석옹철유(石翁喆有)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 과 16나한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_출처 대흥사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봉안하였다.
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대흥사 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서, 신라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고 전하여 진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적 석탑이다.아래 위층 기단은 각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 만큼 큰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등을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되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 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봐 있다.-출처:대흥사 홈페이지
용화당(龍華堂)
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용화당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체로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건축한 자연 친화적인 건물이다. 건물의 남쪽 부분은 ‘ㄱ’자로 꺽어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건물은 순조 11년(18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초의선사(1786-1866)의 스승인 완호대사(1758-1826)가 스님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813년에 중건한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에서 예가로 유명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6)가 썼다.
천불전(千佛殿)
보물 제1807호
천불전은 과거, 현재, 미래에 어느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이 건물은 1811년 조선 순조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다포계의 팔작지붕으로서 전형적인 조선후기 건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 1705-1777)가 썼다.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의에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의 천불은 경주 불석산(佛石山)의 옥돌로 조성한 것으로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九州)로 표류해 갔다가 다음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된 것이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는 어깨에 ‘日’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4년에 한번씩 천불의 가사를 바꾸어 드리는 불사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수하셨던 가사를 개인이 소장하게 되면 마음속의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많은 분들의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출처:대흥사
봉향각(奉香閣)
가허루(가허루)를 지나면서 마당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로서 스님들이 거처한는 요사채로 사용 되고 있다. 건물 기둥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용화당보다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층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5칸이며 단아한 글씨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에는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1791년 조선 정조 15년에 지은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명(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銘)”과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스님이 1792년 정조 16년에 지은 “건사사적비명(建祠事績碑銘)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이다._출처:대흥사
의중당(義重堂)
의중당(義重堂)은 2층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 으로 봄·가을에 있던 표충사 제사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처리하던 곳이다.
표충사(表忠祠)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표충사는 1788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表忠祠)” 편액이 하사 되었다.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편액은 “임금의 글이 있는곳” 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정조대왕의 글씨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세운 서산대사휴정(休靜 :1520-1604)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전란에서 공적을 세운 사명당 유정스님과 뇌묵당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곳으로 이건 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조선 후기에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으로는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대흥사의 표충사와 1794년 조선 정조 18년에 편액이 하사된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酬忠祠)가 있고,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 리기 위한 사당으로 1743년 조선 영조 19년에 편액이 하사된 밀양 “표충사(表忠祠)” 가있다._출처:대흥사
이 부도전내에는 서산대사부도(보물 제1347호)를 비롯해 대흥사 대종사 13명과 대강사 13명의 부도 및 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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