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남해 천년 고찰 용문사

승학2 2018. 10. 27. 21:15

호구산 용문사(虎丘山 龍門寺)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길 166-11

 

호구산에 자리잡은 용문사(龍門寺)는 신라 문무왕 3(서기663)에 원효대사께서 보광산(錦山)에 건립한 보광사(일명 봉암사)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원효대사께서 그곳에 칠성각을 건립하고 선교의 문을 열어 그 명성을 떨쳤으나 이후 보광사의 사(寺運)이 기울자 조선 현종 원년(1660)에 백월대사께서 용소리 호구산에 터를 정하고 사찰을 옮겨 지은것이라고 하는데, 처음 지은 시기는 알려진 것이 없다.

 

현종7(1666)에 백월대사께서 대웅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 이어 숙종 35(1709)에 염불암이 중창되었고 절의 서쪽에 백련암을 신축하였다.숙종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했다.그 당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 촛대와 번 그리고 수국사금패 등이 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또한 용문사는 호국사찰로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했으며 그때 용했던 삼혈포와 목조 구시통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_출처: 용문사

일주문

 

포대화상 

         

천왕각(天王閣)

경상남도 문화제자료 제150호

 

일주문을 지나면서 만나게 되는 천왕각은 숙종 28(1702)에 지은 건물로서 용문사의 관문이다. 용문사의 사천왕은 다른 절의 사천왕이 마귀를 밟고 있는 것과 달리 관리와 양반을 밟고 있다. 이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항상 민초들의 곁에 있고자 했던 용문사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천왕각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8

 

사천왕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외호신으,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천왕문(天王門) 내부 좌우로 각 2구씩 봉안된다. 용문사 사천왕상은 1702(숙종 28)에 조성되었다.

이 사천왕상의 형상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착용하였으며 상의에 걸친 천의자락이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발 밑에는 악귀 1구씩을 밟고 있다. 또 사천왕은 각각 지물을 들고 있는데, 동방 지국천왕((指國天王)은 비파,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장도,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차(寶叉)를 들고 있다. 방형의 얼굴색은 분홍색을 띠며, 북방 다문천왕만 적색에 연한 검푸른빛의 육신색을 발라 구별하고 있다. 크게 부릅뜬 눈에서 외호신장의 이미지를 한껏 풍긴다.

 

착의는 견갑(肩甲흉갑(胸甲복갑(腹甲요갑(腰甲)을 입었고, 머리 뒤쪽에서부터 발 끝까지 대의가 늘어뜨려져 있는데, 천의에는 대형 화염문이 장식되고, 하반신 아랫부분에는 8자로 매듭지어 있다. 그러나 남방 증장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의 대의는 결실된 상태이다.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흉갑 가운데에 주름진 가슴띠가 둘러져 있으며, 허리띠는 기본적으로 화문장식을 바탕으로 중앙에 용을 장식하였다.

사천왕상이 밟고 있는 악귀는 사천왕상의 육신과는 따로 만들어 배치되었으며 악귀가 아닌 세속 관리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채롭다. 악귀의 형상은 얼굴이 위나 옆을 향하도록 누워 있으며 주로 머리를 틀어올린 남성상으로 표현되었는데, 각각 조금씩 그 모습이 다르다.

사천왕상은 목조 분할 제작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각 이음 부분에 나무심을 끼우거나 철심을 박아 고정시키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분할 부분은 안면 양쪽 볼 부분과 어깨, 갑옷의 앞부분, 허리띠, 천의, 팔꿈치, 무릎, 발등과 발목 등이고, 앞부분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나무심으로 고정시키고, 뒷부분에는 형태의 철심으로 고정시켰다. 채색은 주로 황색과 백, 군청색, 녹청색, 주색, 흑색을 사용하였는데, 일부 청록색과 청남색 등도 보인다.

뒷면두 붉은색을 칠하고 자로 끼워넣기 수법을 사용하였다._출처:한국민족문화백과 사전

봉서루(鳳棲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

 

용문사 정문으로 대웅전 정면과 마주하고 있다. 전면 7, 측면 4칸의 건물로 2층은 설법전으로 활용되고 있다. 봉서루 아래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본당으로 향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누각이기도 하다._출처:용문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849

 

호구산(虎丘山)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용문사의 창건연대는 불확실하나,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錦山)에 세웠다는 보광사(普光寺)가 뒤에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의 용문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찰이 불타버리고 나서 여러차례 중건(重建)하였다.

조선 숙종(肅宗 1675-1720재위)때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의 승병(僧兵)이 활약한 공으로 인해 수국사(修國史)로 지정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係) 팔작(八作) 건물이다. 그러나 다포계 팔작 건물 치고는 기둥머리 장식물의 크기가 비교적 커서 처마의 돌출이 심하고 지붕이 웅장하다. 그러므로 처마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네  귀통이의 받침기둥(活柱)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 건물의 특징은 탁월할 정도로 뛰어난 조성기법에 있다. 정면의 중앙기둥 위쪽에 있는 용머리 장식은 그 솜씨가 대단히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다. 또 연꽃과 구름무늬가 중앙에 피어오르게한 안쪽의 포작 구성은 내부 공간을 더욱 현란하게 만들고 있다.

남해용문사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6

 

이 삼존불은 대웅전 중앙에 위치한 장방형 불단위에 각각의 연화좌를 두고 그 위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 뒤편 정수리 쪽으로 서너 개의 나발이 결손 되었거나 소매와 군의자락에 도금이 탈락한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세 구의 불상은 저부에 마련된 복장공이 모두 열려 있었고, 복장물 역시 대부분이 도난당한 상태였으며, 그중 경전, 다라니 등이 불상 내부의 목 부분과 팔, 다리 쪽으로 끼워져 남아 있었다. 또한 양측 협시상은 저부의 복장공 외에 배면 중앙에 타원형의 복장공을 따로 만들어 다른 판재로 엉성하게 덧대어 마감되어 있었다. 배면에 마련된 별도의 복장공은 팔의 내부나 머리와 같이 좌상의 밑바닥에서 복장물을 채우기 어려운 것을 쉽게 처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문화재청

 

대들보에서 내민 용머리 등의 사실적 표현은 마치 천장 전체에 여러마리의 용이 노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아마 이 사찰이 조선 후기 호국사찰로 국가에서 보호를 받았던 만큼 절의 재건에 국가적 지원이 있었을 것이며 그때 국가에 소속된 장인(匠人)이 초빙되어 예술적 경지가 높은 이 건물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_출처:용문사

삼장보살탱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52

 

이작품은 용문사 대웅전 반대측 벽면에 걸려있는 신중탱(1897)과 동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역시 규모(세로 186.3cm, 가로 255.5cm)가 비교적 큰 편이고 19세기 삼장보살도상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형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삼장보살탱의 구성은 상하 2단으로 상단에는 세보살상과 권속들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각종 신중상들을 배치하고 있다. 중앙에 천장보살과 그 좌우에 합장형의 진주. 대진주보살을 두고, 그 좌측(향우측)에는 지지보살과 용수. 다라니 보살이 시립하고 우측(향좌측)에는 정형의 지장보살 좌우에 도명과 무독귀왕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 위쪽에는 천부중, 신중, 명부중 등 제권속들의 상반신만 묘사된 채 화면을 메우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가운데 동자 2구외에 22구의 신장상이 상하 2열로 배치되어 있다. 삼장보살의 육신부는 살색바탕에 먹선으로 그의 뒤 다시 옅은 갈색 세선으로 윤곽을 잡고 있으며,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은 짙은 녹황색으로 채색하여 표현하고 있다._출처:용문사

동종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77호

 

남해 용문사 대웅전 내에 보관된 이 동종은 음통과 용뉴가 1개씩 있으며, 편평한 천판은 세장방형의 12개 연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鐘形은 견부에서 鐘口로 내려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용뉴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의 머리와 3개의 발가락을 가진 두 발이 모두 천판과 맞닿아 있고, 몸의 형태는 자형으로 1개의 여의주를 받치고 있으며, 꼬리 부분은 음통을 2번 휘감고 있다. 용의 두부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 크게 벌린 입, 뿔 표현이 생동감 넘치고 비늘 표현도 비교적 사실적이다. 음통의 구연부분은 4개의 연잎이 만개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은 사선문으로 처리하고 있다. 상대는 돋을새김의 원권(圓圈)梵字文을 삽입하여 배열하였으며, 신부에는 4개의 유곽을 배치하고 유곽과 유곽사이에는 합장형 보살입상 4구를 배치하고 있으며, 당좌는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유곽은 사다리꼴 형태로 그 안에 총 9개의 볼록한 와 유좌가 위치하며, 유곽대에는 연속 당초문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상은 사다리꼴의 틀 안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표현 하였는데, 두부에는 2조의 선으로 구성된 원형 두광을 구비하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상호는 코와 입 표현이 비교적 사실적이며, 군의 위에 천의를 걸쳤으며 의습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다. 하대는 종구에서 약 5cm 떨어진 위치에 연화당초문을 둘러 나타내고 있다._출처:국가 문화재청

탐진당(探眞堂)

신운 화상이 탐진당을 세워 승당으로 학승들의 수행공간으로 쓰이는 곳이다. 탐진은 진리를 구한다는 뜻으로스님들은 이곳에서 공부하며 진리를 참구한다._출처:용문사

적묵당(寂默堂)

상법화상이 적묵당을 건립하여 본래 선당으로 지어저 선방으로 쓰였으나 현재는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등 다목적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초석을 일정 비율로 경사지게하여 아궁이에서 굴뚝에이르는 온돌의 열전도율을 높이는 공법으로 시공된 것이 특징이다._출처:용문사

명부전(冥府殿)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1

 

명부전은 저승 유명계(幽明界)를 사찰속에 옮겨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地藏普薩)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이 전각은 1662(현종3)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며, 정면 3, 측면 2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은 대단히 정교하게 제작된 것으로 신라 원효대사가 직접 조성하고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출처: 용문사

목조지장시왕상(南海 龍門寺木造地藏十王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6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협시불 도명존자는 오른손에 석장을 쥐고, 우협시불 무독귀왕은 합창을 한 채 각각 시립된 자세로 봉안 되어있다.

 

시왕상들은 모두 등받이와 팔걸이, 족좌가 있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향한 자세이며, 표현기법은 거의 동일하다. 두부에는 무독귀왕상과 같은 원류관 형태의 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홀(5·6·7·8·9·10)을 쥔 경우, 책과 붓(1·2)을 들고 있거나 손을 무릎 위에 걸친(3) 다양한 모습이다. 얼굴의 세부표현은 도명과 무독상과 거의 같은데, 입꼬리가 올라간 상태에서 백색 치아를 드러내어 익살스럽게 웃는 모습은 매우 해학적이다._출처:_국가 문화재청포탈싸이트 요약

용화전(龍華殿)

용화전에는 석조보살상(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38호)이 봉안되어 있는데 경내 정화불사를 할 때 법당 마당에서 출토되었다. 이 보살상은 보관에 영락비천을 착장하고 있어며 고려초기의 작품으로추정하고 있다.

앉은키 81cm, 어깨너비 38cm, 무릅 폭 60cm의 보물급 석불이다. 미래불인 미륵은 미륵심부경을 토대로 한 신앙으로 상생과 하생 그리고 성불이라는 신앙체계를 거치면서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을 구현한다.-출처 : 용문사

 

범종각(梵鍾閣)

불전사물(범종. 법고.목어. 윤판)을 비치하는 사찰당우로 범종루라고도 한다. 범종은 사찰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이며 지옥의 중생에게 불음을 전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법고는 축생의 부류를, 목어는 수중의 생명을,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치는 법구이다.-출처 : 용문사

 

 영산전(靈山殿)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건물의 외양은 주불전에 비해 격이 낮고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소박하고 간결하다._출처:용문사

칠성각(七星閣)

수명장수신인 북두칠성을 신격화하여 봉안한 당우로 1970년 염불암의 칠성각을 이건하고 2003년 중건하였다.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선비스러운 칠성탱화를 모시고 있다.

 

구유(일명 구시통)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7

 

많은 대중들의 밥을 퍼두는 하지통이라 할수 있다. 본시 구유는 아름드리 통나무속을 파내고 마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인데, 많은 신도들의 운집하는 법회나 대작불사를 회향 할때와 유사시 승병들의 밥을 퍼두던 용기로 발전하였으며, 천명분의 밥을 퍼담았을 정도 큰 그릇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의 밥을 퍼 담아 쓰던 밥통으로도 전해온다. 통나무 몸통 둘레3m, 길이 6.7m이나 되는 거대한 밥통이다._출처:용문사

촌은집 책판(村隱集 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72호

 

“촌은집”은 조선인조(仁祖)때의 학자이자 시인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의 문집이다. 원래 “촌은집”은 저자 자신이 직접 시를 모아 엮은 것을 교서관(校書館 : 국가에서 책등 인쇄물을 발행하는 관청)에서 간행하였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뒤에 후손인 유태웅(劉泰雄)이 숙종 33년(1707년)에 호남만호(湖南萬戶)로 있을 때 이곳 용문사에서 다시 간행하였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책판은 이때 만든 것이다. 근 3백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러는 썩고 더러는 훼손된 부분도 있어 현재는 52매만 남아있다. “촌은집”에는 주로 시가 수록되어 당시 사대부들의 문장위주의 문집과 대비된다. 이는 시에만 전념한 유경희의 일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서민문학(閭港文學)의 효시로 국문학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희경은 시문 이외에도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國喪)이나 사대부의 상을 주관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그렇지만 1618년(광해군 10)에 유희경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요청한 이이참(李爾瞻)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그와 절교한뒤 사대부들과 시 짓기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출처: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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