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東鶴寺)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동학사(東鶴寺)는 713년 당나라 스님 상원(上願)조사가 지은 상원암(上院庵)에 연원을 두고 있다. 상원암은 은혜를 갚으려는 호랑이 덕분에 여인을 만난 상원조사가 여인과 의남매를 맺고 함께 도를 닦았던 곳이다.
성덕왕 23년(724)에 회의(懷義)화상이 두분을 기리기 위해 쌓은 탑이 현재 상원사지에 남아있는 남매탑(보물 제1284호 공주 청량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285호 공주 청량사지 칠층석탑)이다.
고려 태조 3년(920)에 도선(道詵)국사가 지금의 동학사 자리에 사찰을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이 되었다. 고려 태조 19년(936), 신라가 망하자 류차달이 이곳에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을 제사하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건축하였고, 이후 사찰이 번창하자 절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영조 4년(1728) 신천영의 난으로 사찰과 사당 모두가 소실된 것을 , 순조 14년(1814) 월인선사가 신축하였으며, 고종 원년(1864) 만화선사가 중창 하였다._출처 :동학사
공주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公州東鶴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服藏遺物)
보물 제1719호
충남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 1로 346
공주 동학사 목조 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불교 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을 통해 1606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와 제작자, 그리고 제작에 참여한 제작주체를 분명히 알수 있어 조선 중.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불상을 조각한 석준(釋俊), 각민(覺敏)등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으로 추정되는데, 1600년을 전후한 시기의 화승들의 활동과 교류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석가여래삼불상은 16세기 조각전통을 계승하면서 17세기 새롭게 대두된 대중적인 미의식도 반영하고 있고, 석준이나 각민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각승들이 17세기 불교 조각계를 주도하고 있는 만큼 여러모로 조선중. 후기 불교조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수 있다.
또한 도상은 임진왜란 이후 비로나자불상과 함께 크게 유행한 석가여래삼불 형식을 정확히 보여주며, 발원문에 정확한 존상명칭을 기록하고 이후 전개될 석가여래삼불상 도상연구에도 기준이 된다._출처: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동학사 삼층석탑(東鶴寺 三層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충남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 1로 346
동학사 삼층 석탑은 계룡산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설에는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동학사를 지을 때 함께 만들어졌다고 하나, 탑의 모습을 볼 때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원래 탑의 1층과 2층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2008년에 기단부와 3층을 복원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층 한 면에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_출처 : 동학사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남매 탑(男妹 塔)
남매탑은 동학사와 갑사의 중간 지점인 삼불봉 밑의 옛 청량사 터에 탑 2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5층(보물 제1284호), 다른 하나는 7층(보물 제1285호)으로 청량사지쌍탑(淸凉寺止雙塔)이라고도 불리며, 남매탑이란 이름에 걸맞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통일 신라시대의 한 스님이 토굴을 만들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호랑이 한마라가 나타나 울부짖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입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 있어 뽑아주었더니 며칠 뒤에 호랑이는 은공을 보답하는 뜻으로 한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업고와 놓고 갔습니다. 처녀는 경상북도 상주사람으로 혼인을 치른날 밤 호랑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스님에게 말하였다. 그때는 산에 눈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었습니다.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오자 스님은 수도승으로서 남녀의 연을 맺을 수 없기에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곳으로 시집 보낼수도 없고 인연이 그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주기를 바랬습다. 이에 스님은 고심 끝에 그 처녀와 의남매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서 불도에 힘쓰다가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들게되자, 이두 남매의 정을 기리기 위해 탑을 건립하여 두 스님의 사리(舍利)를 모시게 되어 “남매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_출처: 계룡산 국립공원
●동학삼사(東鶴三祠)
숙모전(문화재자료 제67호), 삼은각(문화재자료 제59호), 동계사가 위치하고 있다. 가장 먼저 건립된 동계사는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제각으로 고려 태조 19년(936)에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이 건립하였다. 1956년 중건하면서 류차달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삼은각은 길재(吉再)가 조선 태조 3년(1394)에 동학사에 와서 고려 왕(태조. 충정왕. 공민왕)을 제사하고, 절 옆에 단을 쌓아 정몽주(鄭夢周)를 제사 한데서 비롯되었다. 정종 1년(1399)에는 고려 유신 류방택이 이색(李穡)을 제사지냈고, 정종 2년(1400)에는 공주목사 이정간이 제단의 터에 건물을 세웠다. 그 후 세종 3년(1421)에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 배향하여 삼은각이라 불렀다.
숙모전은 세조 2년(1456) 김시습(金時習)이 노량진 강변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 지낸 후 삼은각 옆에 단을 만들고 제사한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동학사에 들렀던 세조가 초혼각(招魂閣址)을 건립하였으며, 영조 4년(1728)에 불탄 것을 고종 1년(1864)에 중건하였다. 초혼각 북벽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동벽에는 고려말 충신인 삼은과 계유정란 때의 삼상(황보인. 김종서. 정분) 및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홍도 등을, 서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 등을 모셨다. 고종 20년(1883)에 초혼각 외에 동. 서무를 세워 군신을 나누어 모시게 되었으며, 고종 41년(1404)에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개칭하고 단종비 정순왕후를 함께 모셨다._출처 : 동학사
동학사 숙모전(東鶴寺 肅慕殿)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번지
숙모전은 초혼각이 있던 자리에 조선시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1452∼1455 재위)을 모신 사우이다. 동무. 서무에는 당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며 절의를 지킨 사육신과 생육신. 육종영(왕실 6인 종친). 그리고 세조가 직접 이름을 내린 280여명을 포함하여 충절인 351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세조 2년(1456) 김시습이 찾아와 통곡하며 초혼단을 설치하여 사육신의 초혼례를 지냈고, 세조 3년(1457)에는 세조가 이곳을 들러 혼령들을 위로하고, 유교를 믿는이나 불교를 믿는 이가 함께 제사하도록 하고 건물을 짓게하여 초혼각이라 부르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초혼각이 불타 없어졌으나, 고종 6년(1868) 3칸 건물을 세우고 고종 20년(1882)에 건물을 중축하여 전각의 모습을 갖추었다. 광무 8년(1904)에 고종이 숙모전(肅慕殿)이라 사액(賜額)하여 국가 인정으로 격상 되었다._출처 : 동학사
동학사 삼은각(東鶴寺 三隱閣)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번지
삼은각은 고려말의 충신인 삼은(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의 삼은(三隱) 위패를 모신 곳이다.
태조 3년(1394)년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정종 1년(1399)에는 고려 유신 류방택(柳芳澤)이 초혼단을 고쳐지어 이색의 제사를 지냈고, 정종 2년(1400)에는 공주목사 이정한(李貞翰)이 단의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제단의 터에 건물을 세웠다. 그후 세종 3년(1421)에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 배향하여 삼은각(三隱閣)이라 불렀다.
광해 13년(1521)류방택을 추배하고, 1924년 이승인과 나계종을 추배하여 지금에 이르기 까지 6인을 제사 지내고 있다._출처 : 동학사
동계사(東雞祠)
동계사는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박재상은 신라 19대 눌지왕 2년(418)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아우 미사혼을 구출하고 일본에서 순절하였다. 고려 태조 19년(936) 류차달이 박재상의 충절을 기려 이곳에 초혼 제사를 시작한 후 왕명으로 동계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1956년에 고쳐 짓고 류차달을 추배하였다._출처 :동학사
초혼각지(招魂閣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8호
초혼각은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단종을 폐위할 때 끝까지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과 여러 충신을 제사 지내던 곳이다. 1457년 매월당 김시습 등이 삼온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만들었다. 그 이듬해 세조가 직접 찾아와 제단을 살피고 자신의즉위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적어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후 초혼각을 짓게 하였다. 그 후 승려와 유생이 제사를 이어오다 영조 4년(1728)이인좌의 반란군에 의해 초혼각이 불탔으나 고종대에 초혼각지에 건물을 짓고 광무 8년(1904)에 고종이 “숙모전”이라 사액하였다._출처 : 동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