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修德寺)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79
수덕사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없지만, 학계에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 되었다고 한다. 문헌에는 12개의 백제 사찰이 사찰이 전해지는데,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 충열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 석탑, 자기, 와당 등 여러유물이 남아있어 대가람으로서 융성했던 면모를 볼수 있다.
수덕사는 1962년 3월25일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하였으며, 현재 충남일대 5개 지역의 80개 사찰을 관할하고 있다. 그리고 산하에는 예산군 노인종합복지회관, 홍성군 노인종합복지관, 수덕사 노인요양원에서 돌봄 업무를 담당하고, 서광사 부설 서광어린이집, 서광유치원, 태안 흥주사 어린이집에서 미래세대 양육을 담당하고있는 사찰이다.
1984년11월 29일 근대 선풍을 진작한 선지종찰임이 인정되어 덕숭총림으로 승격되었고, 1996년 수덕사 승가대학(강원)을 개설하여 승가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기존 교구본사로서의 위상에 종합 수도도량으로서의 역할까지 겸비하였습을 의미한다.
(현재 8대 총림으로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 수덕사. 백양사. 범어사. 동화사. 쌍계사이다)_출처 : 수덕사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 한다._출처 :수덕사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배나 된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_출처 :수덕사
수덕사 7층석탑(修德寺 七層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이 탑은 1931년 만공 대선사(滿空 大禪師)께서 건립한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기단 면석 밖으로 두드리지게 우주(隅柱:모서리 기둥)를 표현하였고, 면석(面石)에는 두께 10cm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러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屋身)은 없는데, 옥신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 각층의 면석과 지붕돌은 별개의 돌로 이루어 졌고, 면석 마다에는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2단의 지붕돌 받침을 가지고 있는데 반전이 매우 심하다. 상층부에는 찰주(擦柱). 보주(寶珠). 보륜(寶輪)이 올려져 있다.대체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탑이다._출처 : 수덕사
수덕사 삼층석탑(修德寺 三層石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불가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탑을 세우고 자신의 사리를 그 속에 보관하라고 하면서부터 불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무로 만든 목탑을 세웠으나 삼국시대 말에 석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수덕사 삼층 석탑은 바닥돌부(기단부)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 아래층 바닥돌에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몸돌부(탑신부)는 3층이지만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지붕돌은 처마가 수평을 이루다가 끝부분이 살짝 들려져 있으며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꼭대기(상륜부)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구슬 장식이 올려져 있다. 현제 1. 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된 상태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수덕사 3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인 665년(문무왕 5)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지만 석탑의 전체적인 양식과 조각방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양식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초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_출처 :수덕사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
국보 제49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79
석가(釋迦), 아미타(阿彌陀), 약사(藥師)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은 1937년 해체 수리시에 “지대원전(1308년-고려 충렬왕 34년)”이라는 묵서(墨書)가 발견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중의 하나이다.
정면3칸, 측면4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가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바른 돌쌓기 형식의 기단에 사각형의 자연석(自然石)으로 기둥 놓을 자리를 북돋게 조각한 주춧돌을 놓았고, 그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한 빗살 3분 합문이 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뒷면에는 각칸에 문을 장식하고 있지만 중앙칸에만 문을 달았다. 외부에 노출된 가구(架構)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끼지며,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수 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난 점으로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_출처: 수덕사
수덕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修德寺 木造釋迦如來 三佛坐像 및 腹藏遺物)
보물 제1381호
대웅전내에 모셔진 목조삼존불상은 1938년 만공(滿空)선사께서 남원 만행산 귀정사(歸淨寺)에서 이운한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로 부쳐님의 불복장유물과 중앙 석가모니불의 연희대좌, 육각수미단 등이다.
보물로 지정된 연화대좌는 현재 박물관 수장고로 이운 되어 보관 중이다. 삼존불의 연화대좌와 약사불, 아미타불릐 육각 수미단은 고려시대의 전통기법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또한 삼존불 뒤편 목조로된 대형 괴불함에 모셔진 노사나불 괘불도(보물 제1263호)는 크기가 가로 7.27m, 세로 10.59m로 큰 법회나 의식이 있을 때 대웅전 앞에 걸어놓고 행사를 봉행한다._출처: 수덕사
이응노 선생 사적지(李應魯先生事蹟地)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번지
고암이응노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 1,504㎡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응노 화백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세계를 접목하는 시도를 한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화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덕여관은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수덕사 위쪽에서부터 내려온 좁은 개울물이 집 앞으로 흘러 지나가고 개울 건너편에 여관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ㄷ”자 초가가 감싸고 있는 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관만 아니라면 소담하면서 궁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이라 하겠다. 후면에는 이응노 화백이 사용하던 우물이 있다. 응노선생 사적지를 찾는 사람들은 바위 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먼저 찾는다. 이응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전 이곳에 머물면서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다.
둘레 17m, 높이 85cm, 또 하나는 둘레 7.6m, 높이 75cm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하였다.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을 그린 거냐고 묻는 이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_출처 : 수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