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장성 백양사

승학2 2021. 11. 24. 22:18

장성 백양사 백학봉(長城 白羊寺 白鶴峰)

명승 제38호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백암산 아래에 자리한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의 암벽과 식생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에 명승 제38호로 지정 되었고,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왔을 만큼 이름난 곳이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에 포함된 산으로써, 이 산에서 뻗은 능선이 백학봉까지 이어진다.

백양사(白羊寺)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조사가 창건하여 백암산 백양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고 개명했다.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고, 1574년(선조7) 환양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 했는데 이것은 환양의 “법화경” 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스님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극락보전, 사천왕문, 명부전, 칠성각, 보신각, 설선당, 선실, 요사채, 범종각 등이 있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의 소요대사부도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이 집전되는데 관조부, 전경부, 정근부, 송주부, 범음부가 각각 행해진다. _출처-브리태니커

 

 

백양사 쌍계루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쌍계루는 1351년 각진국사가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이때 누각 명칭은 “橋樓”라 하였으나, 이후 1370년 청수스님이 중창하면서 圃隱 鄭夢周에게 기문을 부탁하여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쌍계루(雙溪樓)라 하였다. 쌍계루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백암산 내 명소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유.불교를 막론하고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시를 짓거나 글을 남겼다. 쌍계루 내 현판에 적힌 많은 시문들은 조선시대 이 누각의 명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쌍계루에 관하여 포은 정몽주 이외에도 목은 이색. 삼봉 정도전이 기문을 남겼으며, 면양정 송순. 노사 기정진. 최익현. 서옹스님등이 남긴 시문이 현판에 전하였다.

쌍계루는 여러차례에 걸친 사찰 중건 시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으로 백양사가 피해를 입었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쌍계루는 1986년에 건립된 것이다._출처 : 백양사

 

백양사의 비자나무 숲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153호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산115-1, 산11

 

백양사 비자나무 숲은 추위에 약한 난대성(暖帶性) 상록침엽교목(常綠針葉喬木)이면서 북쪽 넓은 지약에 분포하고 많은 비자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1962년 12월 3일부터 국가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 숲은 고려시대 각진국사(覺眞國師 : 1270∼1355)가 당시 구충제로 사용되던 비자열매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열매는 구충제와 같은 의약자료와 식용유 같은 식물성 기름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목재는 탄력이 좋고 무늬가 예뻐 건축과 가구자재, 조각과 바둑판 등에 많이 쓰였다. 우리나라의 비자나무 숲은 제주도, 전남의 해남, 고흥, 화순, 전북의 고창, 정읍 등 남부지역에도 분포되어 있어나, 그중 백양사 비자나무 숲은 가장 넓은 710.697㎡ 지역에 7천여 그루 이상 자생하고 있다. 비자나무 숲은 절 입구 계곡의 양쪽 옆, 백양사 주변의 운문암과 약사암 그리고 천진암 입구 주변, 가인마을 뒤쪽 청류암 입구 주변등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백양사에서는 오랫동안 산과 나무를 맡은 산감(山監)스님을 두고 비자나무를 절을 대표하는 나무로 관리해 왔으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나뭇잎이 비(非)자 모양이라 비목(榧木)이라고도 불린다. _출처 : 백양사

백양사 사천왕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백양사 사천왕문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이 불법(佛法)을 수호하면서 악귀가 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백양사의 출입문이다.  지금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송만암대종사가 백양사를 다시 지을 때 건립되었으며, 1945년 8월 낙성식을 치르고 다음주에 해방이 되어 “해방사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건축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지붕 옆면이 “人”자 형태)으로 중앙 1칸은 문으로 이용되고, 좌우 2칸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내부 천장 중앙은 우물정(井)모양이고 주변은 경사진 빗천장이며, 공포(拱包)는 익공(翼工)과 주심포(柱心包)를 병용한 절충형이다.

 

 

오른쪽 칸에는 동쪽을 지키는 파란 얼굴의 지국천왕(持國天王)이 비파를, 남쪽을 지키는 빨간 얼굴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보검을 들고 있다. 왼쪽 칸에는 서쪽을 지키는 까만 얼굴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용과 여의주를, 북쪽을 지키는 까만 얼굴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_출처 : 백양사

 

 

 

백양사 대웅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백양사 대웅전은 “본존불(佛)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다양한 예불과 의식이 치러지는 사찰의 중심이 되는 법당(法堂)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대종사가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뒤쪽 백학봉의 드센 기운을 막기 위해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높게 지었으며, 높직한 장대석으로 다듬은 3단의 기단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둥근 기둥을 세웠다.

 

내부 천창은 나무 재료가 보이지 않게 우물정(井) 모양이고 바닥 역시 우물마루이다. 화려한 단청은 조선후기 불화의 맥을 잇는 보응스님의 제자 일섭(日燮)스님의 마지막 작품으로 희귀성이 인정되어 눈길을 많이 끈다. 특히 천장의 봉황, 용 등의 조각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드물고, 엄숙하고 위엄있는 천상 세계를 실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_출처 : 백양사

 

 

팔층석탑(八層石塔)

이탑은 대웅전 뒤뜰에 있으며 1924년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기 위하여 8층으로 조성하였으며, 탑 내에는 근대 불교계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용성(龍城)스님이 간직하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기단부는 3중이며, 최상층 기단은 원기둥 4개를 세워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석에는 우주를 비롯한 별도의 조각이 없으며,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얕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형태이다. 상륜부는 보주형이다. 이탑 뒤편에는 만암스님이 비문을 쓴 사리탑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탑 정면에는 팔정도의 각 단어가 새겨진 석주가 4주씩 나란히 세워져 있다._출처 : 백양사

백양사 극락보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백양사 극락보전은 불교 이상형인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주불(主佛)인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佛殿)으로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백양사 옛 이름이 정토사(淨土寺)에서 알수 있듯이 이곳이 서방극락정토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왔다.

건축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지붕 옆면이 ”人“자 형태)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포가 올려진 다포(多包)건물이다. 내부에는 가운데에 아미타불, 양옆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협시보살로 모시고 불상 뒤에 후불탱화가 있으며, 천장은 우물정(井)자 모양이고, 양쪽 벽면에는 단색으로 담담하게 그려진 벽화가 있다.

극락보전을 짓는데 문정왕후(1501∼1565)가 참여했고 1574년(선조 7)에 환양스님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건물은 1917년 만암종사가 백양사를 중창하면서 다시 지어졌으며, 비교적 옛 건축양식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귀중하고 가치있는 건축물로 평가된다._출처 : 백양사

장성 백양사 목조아마타여래좌상

보물 제2066호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선조 40년(1607) 조선후기 현진(玄眞)등 3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으로 돌아가신 선왕(先王)과 선왕후(先王后)를 비롯한 왕실 조상들의 성불(成佛)을 기원할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임진왜란 등 국가적 전란이 끝나고 몇해가 지나지 않아 진행된 불교 복구과정에서 제작된 것이자, 1610년 이전에 조성된 불상중 규모가 가장큰 대형불상이다. 불사(佛事)의 전모를 알수 있는 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좌 밑 묵서(墨書)에는 불상 제작과 관련된 연대와 제작자 등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있어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를 위한 귀한자료이다. 이 불상을 주도적으로 만든 현진(玄眞)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기존에 알려진 그의 작품중 가장 이르다고 알려진 1612년 제작 “진주 월명암 목조아미타불좌상” 보다 5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조각사적의의 또한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_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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