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百潭寺) 전통사찰 제24호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로746
전화 (033)462-6969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 사찰로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담사는 서기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寒溪寺)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한계사로 창건후 1772년(영조 51년)까지 운홍사, 삼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에 최붕과 설담(雪潭)이 백담사로 개칭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 수 많은 운수납자가 불원천리하고 이 곳 백담사 계곡을 찾아 시원하게 흘러가는 계곡의 맑은 물에 객진 번뇌를 털어내고 설악영봉의 푸른 구름을 벗 삼아 출격장부의 기상을 다듬던 선불장이 었다.
현제 백담사에는 극락보전, 나한전, 법화실, 화엄실, 산령각등 5개의 기존건물 외에 일주문, 금강문, 무설전, 완허당, 봉정당, 각일당, 검인당의 수행공간이 있으며, 만해 한용운 선사의 불교정신과 문학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만해교육관, 만해기념관 등 총 32개의 전각이 자리한 한국의 대표적 고찰의 하나이며,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기본신원으로 지정되어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다.
또한 전두환 전대통령 부부는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참회한 곳 이기도하다. _출처 백담사.
백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부복장유물 보물 제1182호
(白潭寺 木造阿彌陀佛坐像 附復藏遺物)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2리
이 불좌상은 1748년(영조 24)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무를 깍아 만들었으며 크기 87㎝ 정도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고. 왼손은 다리위에 올려놓고,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수인:手印)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미타부처의 손모양이다.
아미타부처는 서쪽의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이다. 머리에는 마치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빙빙 돌려진 꼬불꼬불한 머리카락(나발:螺髮)이 선명하다. 불상머리 꼭대기의 커다란 상투구슬, 표정 없는 얼굴, 가슴위를 가로지르는 내의(內衣) 표현 등은 조선시대 후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불상의 내부에서 이 상을 만들게 된 배경과 만든 시기를 알수 있는 발원문(發願文) 4장과 노란색저고리, 보자기에 싸여진 유리와 수정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이 불상의 가치를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의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_출처:백담사
만해 한용운(1879∼1944)선사는 1905년 이 곳 백담사에서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 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로서도 유명하다.
영시암(永矢庵)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720(백담로 1125)
전화(033)-462-6677
조선후기 유학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심원사 남쪽의 조원봉 아래에 인조 26년(1648)에 창건하였다.
숙종 31년(1705)에 모친상을 마치고 설악산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숙종 33년(1707)에 조원봉 남쪽 벽운사 옆에 벽운전사(碧雲精舍)를 지었다. 이 후 건물이 화제로 서쪽으로 몇십리 더 깊숙한 곳에 정사를 다시 지어 머물렀다. 삼연 김선생 영시암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1709)년 10월에 다시 절에 돌아왔다가 동쪽수리(數里)에 있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자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 영시암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가 이곳에 머문지 6년이 되던해 숙종 40년(1714) 11월에 공역을 하던 찬모(饌母)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춘천으로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찰은 그 뒤 폐허가 되었다. 인제군수 이광구(李廣矩)가 숙종 15년(1689)에 김삼연유허비(金三淵遺墟碑)를 세웠으며, 그 후로 김창흡의 후손과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기는 등 주목을 받았다.
1691년에 오세암의 주지였던 설정(雪淨)이 조원봉 북쪽에 승당 24칸과 비각 1칸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했다. 관동 관찰사에게 절의 지난 내력을 알리고 의논한 뒤 유불(儒佛)을 사모하는 공덕자(公德者)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절을 중건하고 낙성하였다. 절의 규모가 높고 크며 견고함이 천궁(天宮) 같았다고 한다. 풍악과인(楓嶽過人)이 지은 「영시암 개금 불사기(永矢庵 改金 佛事記)」에 의하면 옛 암자는 조운봉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1760년 11월 7일에는 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석존불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며 1925년 이기호가 영시암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중수하였다. 그 후 윤기중(尹基重, 1931~1934)과 김재호(金在浩, 1934~1940)가 주지에 재임하였다. 6·25전쟁 시 전각들이 불에 타버린 것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 김충현(金忠顯)과 김응현(金膺顯)의 후원을 받아 법당과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인의 주목을 받았던 설악산의 유명사찰로 조선 후기 유·불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