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밀양 홍제사

승학2 2021. 7. 13. 16:58

홍제사(弘濟寺)

경남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 4

 

홍제사는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당수호사찰이다. 불교을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사명대사의 비가 이곳에 자리한 것은 무안지방이 그의 출생지 인연 때문이다. 원래 서산,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을 모신 표충사당이 있었으나, 18세기 후 재약산으로 옮겨져, 현재 삼비문(三卑門) 안에는 1742년에 조성된 표충비와 향나무, 비각 수호사찰인 홍제사 만이 남아있다.

표충비각 안에 있는 표충비(表忠碑)는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신비한 비석으로 유명하다. 지역민들은 나라의 우환을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 여기고 있다. 땀은 비석의 전면(全面)에 흐르지 않고 비신의 글자 획 안에서만 흘러나오기도 하여 과학적으로 풀지 못하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홍제사 설립 연혁은 자세하지 않으나 이곳 무안에 표충비가 세워진 1742년(영조 18)에 사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사명대사가 창건한 백하암(白霞庵)이 있던 곳이 였어나, 백하암은 병자호란으로 그 내부에 있던 사당이 퇴락하자 1710년(숙종 36) 밀양부사 김창석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깃고 사당을 정비하였다.

 

 

 

 

홍제사 표충비(表忠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경남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 안길 4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僧兵)을 조직하여 왜군을 무찌르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왜군에게 끌려간 3천명의 조선포로를 귀환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운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 1544∼1610)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2년에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南鵬禪師)에 의해 건립되었다.

 

높이 4m, 너비 1m, 두께 54.5cm인 이 비석은 일반 비석과 달리 비석의 몸체(碑身)를 검은 대리석으로, 받침돌(座臺石)과 머릿돌(螭首)을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앞면과 뒷면에는 표충사(表忠祠)의 내력과 함께 사면당을 비롯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 1520∼1604)과 기허대사(騎虛大師) 영규(靈圭 : ?∼1592)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표충사의 연혁과 임진왜란당시 승병들의 활약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명대사에 대한 비문의 문장은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김진상(金鎭商)이 글자를 썼으며, 맨 위의 전서체(篆書體)의 머리 글씨는 유척기(俞拓基)가 썼다. 서산대사에 대한 비문의 문장은 이우신(李雨臣)이 짓고, 윤득화(尹得和)가 글자를 썼으며, 전서체의 글씨는 조명교(曺命敎)가 썼다. 또 비석의 양면에는 표충사 사적비와 함께 비석 설립에 관계된 사람들의 명단이 실려있다.

 

표충사 사적비는 이덕수(李德壽)가 짓고, 서명균(徐命均)이 글자를 썼으며, 조명교가 맨 위의 전서를 썼다.

이 비석은 국가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어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_출처 : 홍제사

밀양 무안리 향나무(密陽 武安里 향나무)

지방기념물 제119호

밀양 무안면 무안리 903-2

 

이 향(香)나무는 송운대사 영당비(일명 : 表忠碑)가 서 있는 표충비각 경내에 있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인데 나무 높이 1.5m, 가슴높이둘레 1.1m이며 수관(樹冠)의 모양은 녹색의 큰 나무 양산을 펼쳐 세워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의 나무인데 원줄기를 자르고 옆가지를 팔방(八方)으로 뻗게하여 지금과 같은 나무 모양(樹形)으로 다듬고 가꾼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의 향나무는 전국에서 이곳밖에 없는데, 이 나무는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태허당(泰虛堂)남붕선사(南鵬禪師)께서 표충비를 세우고 기념으로 식수(植樹)항 것이라고 전해진다._출처 : 홍제사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 1520∼1604)

조선중기의 승려. 승병장.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리운다. 휴정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 마져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12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 다음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 청학동(靑鶴洞). 칠불동(七佛洞) 등을 유람하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등록(傳燈錄), 염송(拈頌), 화엄경, 능엄경(楞嚴經), 반야경, 원각경(圓覺經) 등의 교리를 탐구하다가 깨달은 봐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머리를 깍았으며,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공부에만 집념하였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 되었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정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효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러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려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직위를 내렸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이미지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 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람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 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 불(佛). 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연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 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심법요초(心法要抄)”. “삼가귀감(三家龜鑑)”. “설선의(說禪儀)”. “운수단(雲水壇)” 등이 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어졌으며,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_출처 :브리태니커 사전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

조선중기의 고승으로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고, 호는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鐘峯)이다.

1544년(중종 30)에 부(父) 임수성(林守成)과 모(母)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이다.

유년시절 이곳 조부밑에서 공부하며 보내고 1556년(명종11) 13세때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에게 유학(儒學)을 배우다 그만두고 부모가 모두 돌아간 후 1559년(명종14) 가을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黙)화상에게서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다. 3년뒤 승과에 합격한 이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 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을 찾아가 수행에 정진했다.

                                                이미지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

 

1589년(선조22)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당해 강릉부의 옥에 갇혔으나, 강릉유생들의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1592년(선조 25)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여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 평양성의 탈환작전에 큰공을 세워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와의 진중을 4차례에 걸쳐 단신으로 들어가 협상회담에 참여하였다.

1595년에는 장편의 상소문을 올려 전쟁에 대비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는 방책을 건의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승려로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하사 받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과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간 양민 3천여명을 인솔하여 1605년 4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한다.

묘향산으로가서 휴정의 영정을 참배한 다음 원주 치악산에 머물렀다. 그후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던 중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7권,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등이 있다.

 

기허대사 영규(騎虛大師 靈圭 : 미상∼1592)

영규대사는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騎虛)이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고 한다.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의병장 조헌(趙憲)과 청주성 전투와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소식을 듣고 영규대사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는데, 하사한 선물이 도착하기 전에 금산전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미지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부상한 몸을 이끌고 현재의 묘소 부근까지 와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승병장인 영규대사의 묘소(충청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사무소에서 계룡산 갑사 진입로를 조금지나 오른편에 해발 150m의 산록 경사면을 깍아 만든 묘소는 최근에 봉분, 축대, 계단등의 시설을 보수공사하였다. 묘비는 순조 10년(1810)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_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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