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진안 마이산 탑사가는 길

승학2 2019. 4. 13. 09:56

마이산(馬耳山)

명승 제12호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진안읍 단양리

 

동쪽 숫마이봉은 해발 680m이고 서쪽 암마이봉은 686m으로 진안읍 단양리와 마령면 동촌리 경계면에 걸쳐있다.

신라시대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 용출산(聳出山) 조선 초 속금산(束金山)에서 현재는 말의 귀를 닮았다는 의미의 마이산(馬耳山)으로 불리우고 있다. 북사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하고 남사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발원한다.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돛대봉. 용각봉. 마이봉. 문필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1979년 전라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고 20031031일에는 마이산 권역 160가 명승 제12호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되었다.-출처: 안내문

마이산의 전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산신(山神)들이 살고 있는 하늘나라가 있었다. 산신들끼리 사랑을 할수 없는데 금지된 사랑을 한 남녀가 결국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지상(地上)에서 살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수억년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어느날 하늘이 열려 천상계(天上界)로 올라가는 승천날이 왔는데 남편이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부정을 타서 하늘로 못올라가니 모두가 깊이 잠든 자시(子時)에 올라가자고 아내에게 제안하였으나, 아내는 한밤중에 무서워서 못올라가니 새벽에 올라가자고 하여 새벽에 부부산신(夫婦山神)은 두 아이를 데리고 승천(昇天)하고 있었느데 마침 부지러한 엽집 아낙네가 우물에 물을 길우러 나오다가 이 광경에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동네 사람들에게 산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소리치는 소리를 들은 남편산신이 화가나서 부인 산신에게 당신 때문에 다 망쳤고 하면서 아이를 빼앗고 발로 차버린 관계로 결국 산신부부(山神夫婦)는 꿈에도 그리던 승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서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숫마이산은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고 암마이산은 미안해서 고개를 떨군채 숫마이산을 등지고 앉아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_출처: 안내문

 

 

 

 

마이산 석탑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35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석탑은 1885년에 입산하여 솔잎등으로 생식하며 수도한 이갑룡(1860~1957) 처사(處士)30여년 동안 쌓아 올린 것이다. 이곳 탑사(塔寺)에는 당시에 120기의 탑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에는 80기만 남아있다. 대부분은 주변의 천연석으로 쌓아졌지만 천자탑등의 주요 탑들은 전국 팔도의 명산에서 가져온 돌들이 한 두 개씩 들어가 심묘한 정기를 담고 있다. 마이산 석탑은 섬세하게 가공된 돌들로 쌓아진 신라 왕조의 탑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막돌히 튼식이라는 조형양식으로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이 적용된 이 탑들은 정성과 탁월한 솜씨로 쌓아졌다. 탑사 내의 탑군을 이루는 탑들은 천지탑(天地塔) 오방탑(五方塔) 약사탑(藥師塔) 월광탑(月光塔) 일광탑(日光塔) 중앙탑(中央塔 흔들탑)과 이 탑들을 보호하는 주변의 신장탑(神將塔)들 처럼 제각기 이름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한 바람에도 약간 흔들릴 뿐 무너지지 않는 탑에서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고 특히 겨울철에도 탑단에 물 한 사발을 올려놓고 정심으로 기도하면 역고드름이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신묘한 현상을 관찰할 수도 있다. 또 탑사 내에는 두권의 서책이 전해 내려오는데 당시에는 이갑룡(李甲龍)처사가 산신들의 계시를 받아 적은 서른 권 분량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마이산 도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곳 탑사는 여러 유적들 특히 대웅전 산신각 미륵불 영신각 종각 요사채 등이 복원 되면서 명실상부한 전통 사찰로 자리잡았고 훌륭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마이산 석탑 주인공

이갑룡의 본명은 이경의(李敬議 )이며 자는 갑룡(甲龍), 호는 석정(石亭)이다.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16대손으로 1860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백수(白壽)를 누리고 1957년에 마이산 기슭에 묻혔다. 본명보다 이갑룡 처사로 불리는 그는 생전의 숱한 일화들을 남겼는데 마이산 인근 사람들에겐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유··선 삼교에 바탕을 둔 용화세계의 실현을 꿈꾸며 이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빌고 창생(蒼生)을 구할 목적으로 30년을 한결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탑을 쌓았다. 그렇게 해서 이룩된 탑이 108개인데 이른바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한다. 탑사의 탑은 자연석을 원뿔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외줄 탑을 올렸다. 탑은 단순한 형식이지만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이 있다. 탑사의 돌탑들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이산 천지탑

주탑인 천지탑은 부부탑으로 2기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13.5m이고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다. 주탑인 천지탑을 정점으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줄줄이 세워져 있고 팔진법의 배열에 의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며 당초에는 120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80여기가 남아있다. 맨 앞 양쪽에 있는 탑을 일광탑.월광탑이라 하며 마이산 탑군은 태풍에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탑들을 보면 양쪽으로 약간 기울게 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탑자가 바람의 방향 등을 고려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_출처 다음백과

 

 

 

 

비룡대 아래에 위치한 고금당(나옹암)을 마이산 하산길에서 당겨 보왔다. 이 곳은 고려말의 고승(高僧)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수도처(修道處)로 전해오는 자연동굴로 나옹암(翁庵)이라 하며  원래 금당사(金塘寺)가 자리잡고 있었던 터라 일명 고금당(古金塘)”이라고도 한다.

 

금당사(金塘寺)

전라북도 잔안군 마령면 동촌리 41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이절의 창건에 대하여 두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설 650(의자왕 10)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11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인 김취(金趣)와 함께 세웠다한다. 당시의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km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의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숙종1)의 일이다.

두 번째설 814(헌덕왕 6) 중국승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한다. 한때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는데, 한때 고려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도 이곳에 머물며 수도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쇠락하였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뒤 1978년에 명부전 1987년에는 산신각 1990년에는 극락전을 새로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 지장전. 삼성각. 대방(大房) 등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금당사 목불좌상(金塘寺 木佛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

 

중국 승려 혜감(慧鑑)814년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 금당사에 있는 불상으로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이다. 본존불은 사각형의 평판화된 얼굴에 비교적 당당한 체구이며 양손을 들어서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둥글게 움츠리고 있는 어깨와 도식화된 옷자락 표현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드러나고 있다. .우 보살은 복잡한 보관(寶冠)이나 가슴의 구슬장식 두 손에 잡은 연꽃가지등 장식적 요소를 제외하면 본존불과 흡사하다. 이불상은 둥근맛 나는 양감과 온화한 얼굴표정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된다.-출처:문화재청

 

 

 

 

금당사 석탑(金塘寺 石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

 

금당사 경내에 있는 이 석탑은 남아있는 부재로 보아 본래 오층탑이었던 것으로 여겨 진다. 기단부(基壇部)는 가운데 돌이 없어져 다른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탑신)능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제작양식이나 수법을 보아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_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금당사 괘불탱(金塘寺 掛佛幀)

보물 제1266

 

이 탱화는 불교의식을 행할 때 법당 마당에 높이 걸어놓고 예배를 올리는 불화이다.조선 1692(숙종 18)에 명원(明遠), 처헌(處軒), 위청(偉凊) 치헌(致軒)이라는 화승(畵僧)이 제작하였다. 삼베 열세 폭을 이어 붙인 높이 8.7m, 4.7m의 큰 화폭에 꽃을 들고 있는 부처를 단독으로 그렸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중앙의 위 아래로 7구씩 총 14구의 화신(化身) 보살을 표현하였고 좌우로 한쌍씩 총 두쌍의 봉황 장식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은은한 무늬와 색상, 당당하면서도 중후한 부처의 모습등이 조선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가뭄이 계속될 때 이 괘불탱을 걸어 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렸다고 전해온다._출처: 금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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