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芬皇寺)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 313) 일대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由緖)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當代)의 명승(名僧) 자장율사(慈裝律師:590∼658)와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주석(主席)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率居)가 그렸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벽화와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조각가 강고내말(彊古乃末)이 구리 306,700근(斤)으로 주성(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등이 있어 사격(寺格)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幢竿)과 지주(支柱). 중문(中門). 석탑(石塔). 삼금당(三金堂). 강당(講堂). 회랑(回廊)을 갖춘 대가람(大伽藍)이 었으나 고려시대 고종(고종) 25년(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을 차례로 겪어면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小失)되어 버렸고 광해군(光海君) 원년(1608)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鑄造)한 보광전(寶光殿)과 약사여래입상(경북 문화재자료 제319호)등이 사역(寺域)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境內)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模塼石塔:국보 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경북 유형문화재 제97호). 구황동 당간지주(九黃洞 幢竿支柱:경북 유형 문화재 제192호). 신라호국룡(新羅護國龍)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石井 : 경북 문화재 자료 제9호)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모전석탑(模塼石塔)
국보 제30호
이 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 수리하였다.
1층 몸체 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 새김 되어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수리당시 탑에서 나온 돌 사리암(舍利函)에는 여러 가지 구슬, 가위, 금, 은바늘과 은합, 숭령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등이 들어있어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연간에 해체, 수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芬皇寺 和諍國師碑趺)
경북 유형 문화재 제97호
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元曉大師) 비의 받침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肅宗) 6년(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 되 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 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 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비신을 받혔던 비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바대는 작육면제이고 상면에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있다.
석정(石井)
경북 문화재 자료 제9호
이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변어정)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 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체(四聖諦)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元聖王)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에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 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 (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 살게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
경북 문화재자료 제319호
분황사 보광전에 모서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 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 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에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 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강희 19년(1680)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 다. 불상 왼손 위에 놓인 건칠제 약그릇(乾漆製 藥盒)의 뚜겅 내면(內面)에“乾 隆三十九年 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의 붉은 글씨가 있으나 건륭 39년은을 미가 아니라 1774년 갑오(甲午)이기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조선 영조(英祖) 50년(1774)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98년에 약사여래입상 개금불사시 약합(藥盒) 뚜껑은 건칠제로 확인 되었으 나 약합의 재질은 미상(未詳)이며 불상은 청동제로 확인 되었다. 불상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 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어 주목된다. 이 불상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높이가 3.4m이다.
구황동 당간지주(九黃洞 幢竿支柱)
경북 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시 구황동 315-2
옛날 절에서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 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 지주는 분황사(芬皇寺)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의 것으로 높이는 360cm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 간대(竿臺)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주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은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竿孔)을 설치하여 양 기둥에 서로 관통 하도록 조성 되어있다. 이 기둥은 황룡사(皇龍寺)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