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구룡포
구룡포 (九龍浦)
동해안의 단조로운 해안선이 남으로 내려오다 유일하게 곶(반도보다 작은 바다의 돌출부)을 형성한 곳이 장기곶이며, 호미(虎尾)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구룡포읍 병포리 진로 종합식품(주) 부근 해안 절벽에 구룡산맥이 흘러오다 멈춘 곳에 기암용문이 있어 구룡승천지지 또는 구룡소(九龍沼)라 하였다 하며 구룡소가 너무 깊어서 가히 그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 振興王 때 장기 縣監이 각 고을을 순찰중 龍珠里(현 구룡포 6리: 옛 지명은 沙羅里)를 지날 때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휘몰아쳐서 급히 민가에 대피하였는데 龍頭山(지금 병포리) 해안 바다에서 용 열마리가 승천하다가 한 마 리는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부른다고 한다.
구룡포 돌문(石門)
이곳은 “구룡포 돌문”이 위치한 장소이다. 당시는 높이 11m, 폭 6m 정도의 돌문은 교통장애와 일부 낙석으로 인하여 1988년 6월에 철거하고 이 바위의 상징을 위하여 바위 상부를 현재 자리에 세워두고 있다.
1400년대에 장기반도는 (현)구룡포읍 구룡리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등선을 넘는 25리(10km)에 10척(3m) 높이의 석책을 쌓아 말을 사육했던 국영 목장이 있었다. 그 목장의 관문이 현재 “구룡포 돌문”으로 불런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문지기 2명이 배치되어 말의 출입을 통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인조 3년(1625년)에 성벽을 보스하고 1066필의 말을 사육하였다 는 대목이 있어 목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구룡포 공원
구룡포 공원 입구 계단에 돌기둥
이곳 공원 입구 계단과 돌기둥들은 1944년도 일본인들이 세웠으며 돌기둥은 왼쪽 61개 오른쪽 59개 모두 120개 있다. 돌기둥은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구룡포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떠난 이후 구룡포 주민들은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모두 덮어 버리고 거꾸로 돌려 세웠다. 그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다시 앞뒤를 돌려 세운 돌기둥에 새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Memorial Monument for Dogawa Yaseubro)
이 비는 일본인 十河彌三郞(도가와 야스브로)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라고 한다. “도가와 야스브로”는 일제 강점기에 구롱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 개설 등에 관여한 사람으로 일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전인 1944년 경에 송덕비를 세웠다 한다. 송덕비는 패전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후 구룡포 주민들이 세멘트로 덧칠하여 현재 비문의 용은 알수가 없다.
충혼탑(Chunghontap Tower)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친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의 바탕 위에서 이룩 되었습니다. 이곳 충혼탑은 6.25전쟁 등 대한민국을 수호하시다 장렬히 산화하신 포하(당시 영일)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0년에 건립하였으나 당시 열악한 재정사황 등으로 탑신의 받침대가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설치한 구조물로 그 위에 충혼탑이 설치되어 오다가 2007년 9월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재 건립된 현충 시설물 입니다.
충혼각(Chunghongak Pavilion)
이 충혼각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60년에 건립하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산화한 포항(당시 영일)지역 출신 전몰군경을 비롯해 235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 거리
동해 최대의 어업전진기지였던 구룡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축항하고 동해 권역의 어업을 관활하면서 일본인의 유입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현재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위치한 거리에는 병원과 백화상점, 요리점, 여관등이 늘어서고 많은 인파가 놀리면서 지역상권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아 있던 일본가옥들은 각종 개발과정에서 철거되고 오랜 세월 동안 훼손되면서 과거 우리민족에게 아팠던 역사의 산 증거물이 사라져 가는 실정을 맞았다. 이에 포항시는 지역 내 가옥을 보수 정비하여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의 풍요했던 생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에 의해 착취되었던 우리경제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를 조성했다. 2011년 3월부터 시작한 정비사업을 통해 457m 거리에 있는 27동의 건물을 보수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2012년 12월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최우수상을수상하며 도심활성화 사업의 우수 사례로 선정되었다.
구령포 근대 역사관(九龍浦 近代 歷史舘)
이 건물은 1920년대 일본 가가화현에서 이주해 온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 가옥이다. 해방 후 개인주택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포항시가 매입. 수리하여 “구룡포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100여전 모습들이 잘 남아 있으며 당시 생활모습을 다양한 전시자료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건물은 일본식 구조적. 의장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안방으로 하시모토 가족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하시모토 어린 막내딸이 부모님과 함께 안방을 사용하였다. 조상을 모시는 부츠단을 두었으며 불박이 벽장(오시이레)과 장을 두고 사용했다. 겨울철에는 고다츠를 두고 온 가족이 모이는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곳은 하시모토 가옥의 집무실로 이용되던 곳을 부엌으로 복원 하였다고 한다.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그 열기로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궁이가 바깥 벽쪽으로 나 있다. 외부에서 들어가는 문과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시모토 딸들의 방
하시모토 가옥의 2층은 주로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사용 되었으며 더운 여름철에는 가족들이 2층을 침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방을 하사모토 딸들이 사용하던 방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모습과 유물을 재현해 놓았다.
벽에는 오시이레(붙박이 벽장)가 있으며 방과 방, 방과 복도 사이에 나무로 된 창살(란마)을 넣어 통풍과 환기가 잘되고 빛이 잘 들어오도록 하였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의 나무 창살을 통해 당시 하사모토의 부와 하사모토 가옥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다.
하시모토 가족이 살던 당시에 이곳은 부엌과 식당이 있던 곳이다. 복원 당시에 외부에 있어서 철거 되어버린 화장실을 이곳에 복원하였다. 전통 재래식 화장실을 재현한 것으로 대변기와 소변기가 나누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