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교촌 한옥마을
경주교동 최씨고택(慶州校洞 崔氏古宅)
중요민속 문화재 제 27호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번지



최초 최부자집 시작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운 최진립(1568∼1636)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위도총부도사, 공조 참판, 삼도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진낸 공으로 부를 쌓아 셋째 아들 최동량(1598∼1664)을 교육시켜 최동량이 최부자집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부친 최진립에게 물려받아 땅을 구입하고 농사를 짓어면서 다른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면 소작료을 수확한 곡식의 반만 받고 중간 관리자인 마름은 두지 않았다. 최동량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최국선(1631∼1682)은 부자집 3대 자리를 물러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이 시작되었다.


최국선은 1671년 조선 현종때에 흉년이 들어 농민이 쌀을 빌려가 못 갚는것이 안타까워하며 아들 최의기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불살랐다고 한다. 이 최부자집은 1년 쌀 수확량이 대략 3천석이 었는데 이중 1천석은 집에서 사용하고 1천석은 과객에게 배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집이 보기 드물게 오랜 세월동안 만석꾼을 유지 할수 있었던 것은 가훈의 덕분이라 할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경주 교촌에 터를 잡은 최부자 집안은 300년 넘도록 지속해온 지역과의 상생 정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및 자금지원 해방 후 사학설립 및 재산기부등으로 한국형 노불리스 오블리제의 본보기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경주교동법주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 “향토술담기” 경주교동법주)

경주교동법주는 현재 기능보유자인 최경(崔梗)의 10대조(代祖)인 최국선(崔國璿)이 조선조 숙종때 사옹원에서 참봉을지낸 후 관직에서 낙향하여 사가에서 처음으로 빚은 술입니다.
9대 진사, 12대 만석으로 알려진 경주 최부자집의 가양주로 300여년 역사를 함께해 왔으며 그 뿌리가 깊듯이 맛 또한 깊습니다. 또한 1500년전 중국 최고의 농서인 제민요술 및 서유기에 기록 되어 있는 법주 및 신라의 비주라 일컬어지는 술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대(累代)에 걸친 봉제사와 접빈객에 사용되어온 법주와 전통안주가 많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오든 중 1986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 “향토술담기” 경주교동 법주로 최씨 가문의 며느리 배영신(裵永信)씨가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아 제조비법을 전승하여 왔으며 21년째인 2006년 3월 그의 아들 최경(崔梗)이 2대째 기능 보유자(안간문화재)로 인정받아 제조비법을 계승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재래식 방법으로 인간문화재가 손수 정성들여 술을 빚어서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주원료는 토종찹쌀이며 밀로 만든 누룩으로 술을 빚습니다.

경주교동법주는 그윽한 향에서 덕을 느낄수 있고 맑고 화려한 금빛에서 품위를 볼수 있으며 부드럽고 깊은 맛에서 최부자의 얼과 정성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잔에서 넘는 술이 술잔을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할 정도로 감미가 있으며 순하고 부드러운 맛과 향 그리고 뛰어난 주실로 과음을 하여도 숙취가 없습니다. 많은 애주가들이 경주교동법주를 최고의 전통 토속명주라 부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요석궁
경주 최부자 종가가 위치한 교동일대가 신라시대 무열왕의 첫 째딸 요석공주가 살던궁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요석궁이 위치한 곳과 월정교가 복원된 장소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가 만난 곳이고 이곳에서 이두문자를 만든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 태어났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정기에는 요석궁이 의병대장 신돌장군과 그 외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제공 되면서 그들에 의해 최부자 집안의 음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 교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요석궁의 한옥건물은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 선생의 동생 최윤 선생께서 생거하던 곳으로 지금도 요석궁에는 그 후손이 터를 잡고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