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역사유적지구(百濟歷史遺蹟地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 서부에 있는 백제 왕도(王都)와 민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중 하나이다.백제역사유적지구는 웅진(공주)시기 왕도와 관련된 유적지인 공산성. 송산리고분군/사비(부여)시기 왕도와 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사비시기의 수도인 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금마저(익산)에 조성된 복도(複都)와 관련된 유적지인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도시계획. 건축기술. 예술. 종교등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 시킨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는 유산이다.

부여 부소산성 (扶餘 扶蘇山城)
사적 제5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외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중심을 이룬 산성으로 도성(都城)을 방어하는 핵심시설이며, 백제가 웅진(熊津: 지금공주)에서 사비(지금 부여)로 도읍을 옮긴 백제 성왕16년(538)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다. 백제시대 산성의 길이는 외곽선을 기준으로 2,495m이며, 바닥의 너비는 5∼6m, 높이는 3m 내외이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 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두 테마식 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으로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사시에 도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 되었다. ㅡ출처 :부소산성





충령사(忠靈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이곳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전목군경(戰歿軍警)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6.25 참전, 베트남 참전, 대간첩 작전 등에서 나라을 위해 헌신하신 927위(2004년 현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사당은 1960년 민간단체인 부여군 전몰군경 충령각건립기성회에서 성금을 모아 건립했는데 건물이 낡고 헐어 부여군에서 2004년 증.개축했다. 전통양식의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내부는 제향을 지내고 위패를 모시는 공간을 두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_출처 : 부여산성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161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25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는 목탑지 기단 심초석에서 금동제과판(金銅製銙板)의 출토 됨에 따라 왕실의 기원사찰(祈願寺刹)로 여기지는 백제시대 사찰터 이다. 이 절터는 중문지(中門址), 탑지(塔址), 금당지(金堂址)가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한 방식으로 주의에는 금단지의 좌우에 있는 동서회랑(回廊)과 중문지에 연결되는 남회랑이 구획된 형태이다. 이곳에서는 소조불상(塑造佛像), 연화문(蓮花文)수막새, 벽화편 등이 출토 되었다. _출처 :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사자루 (扶餘 扶蘇山城 泗泚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1919년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해발 106m) 송월대에 임천면의 관아 정문이던 개산루를 옮겨 짓고 이름을 사자루로 바꾸었다. 2층 문루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천왕 이강이 쓴 “사자루(泗泚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해강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白馬長江)”이라는 헌판이 걸려있다. 이 지역은 백제시대에는 망대역활을 하였던 곳으로 백제시대 초석, 장대석, 입편이 분포하고 있으며,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 되었다.




부여 부소산성 백화정 (扶餘 扶蘇山城 百花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낙화암 정상부에 있는 육각의 정자건물이다.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의 발의로 부풍시사라는 시우회를 세웠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소동파가 해주에 귀양가 있을 적에 성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榭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부여외곽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낮은 산들이 어울려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아주 일품이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는 듯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이기도 하다._출처 :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 (扶餘 扶蘇山城 落花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낙화암은 부소산성 북쪽과 백마강 변에 위치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멸망하자 궁인들이 화(禍)를 피하지 못할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부여성 북쪽 구석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궁인을 꽃으로 비유하여 이곳을 낙화암으로 불렸다. 낙화암 높이는 60m 정도이며, 절벽아래 송시열의 글씨로 전해지는 “낙화암” 글자가 새겨져 있다. _출처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 고란사 (扶餘 扶蘇山城 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지어진 절로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사찰의 유래는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로부터 온것이라 전하며, 고란사 뒤 절벽에 자생하는 고란초와 한잔에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가 유명하다. 현 건물은 은산 숭각사를 이건한 것으로 정조 21년(1797)에 개건한 것이다. 사찰 전면의 2개의 연화문방형초석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고란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皐蘭寺 木造 阿彌陀如來坐像 및 菩薩坐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8호
부여 고란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과 보살좌상은 고란사 법당에 모셔진 삼존불상 가운데 두 구로, 중앙에 모셔진 것은 아미타여래 좌상이고, 그 오른쪽의 것은 대세지보살상으로 추정된다. 아미타여래 좌상은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넓적다리 위에 엇갈리게 얹어 앉아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네모지고 체구에 비해 크다. 양어깨가 모두 덮어지도록 옷과 편삼을 걸치고 옷자락을 둥걸고 투박하게 늘어 뜨린 모습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얼굴이 개성적이며 크고 목이 유난히 짧은 모습, 넓고 투박한 옷주름 등에는 이를 만든 조각승의 개인적인 성향이 드러난다.
보살좌상은 보석관이나 영락의 표현과 같은 보살의 특징을 제외하면 크기나 기법에서 아미타여래좌상과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아미여래 좌상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상 중 한 구로 추정된데 현제는 아미타여래상의 오른쪽인 대세지보살로 모셔져 있다. 그러나 대세지보살상의 특징이나 지물(지물)이 없어 대세지보살상임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손의 위치를 보면 왼쪽에 모시는 관음보살상일 가능성도 있다.
*.중품하생인 : 부처가 송가락으로 나타내는 표시인 수인(手印)중 하나로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여 엄지와 가운뎃 손가락을 맞댄 형태.
*.영락 : 구슬을 꿰어 몸에 달아 장엄하는 기구. _출처 : 부소산성

고란초와 고란약수
고란초는 강가 절벽이나 산지의 그늘진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형의 양치식물로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고란초란 이름이 생겼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임금이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을 이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 오게 하였다. 이때 고란약수터 주변에서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렸는데, 약수을 떠 오는 궁녀들이 임금에게 바칠 물동이에 고란초 잎을 한 두개씩 물위에 띄워 옴으로서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고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삼년씩 젊어진다고 하며, 약수를 마시고 갓난아이가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란초는 기후오염이나 수질오염 같은 환경오염에 민감한 특성이 있어 환경지표 식물로서도 보존할 가치가 높다._출처 : 부소산성


연리지(連理枝)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다은 체로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지라 한다. 두몸이 하나가 된다하여 흔히 남녀사이의 애틋한 사랑에 빗대어 “사랑나무”라고도 부른다.

태자골 숲길
부소산성의 아름다운 사계절과 태자천을 간진한 이 숲길은 옛 백제 태자들의 산책로로 추정되는 곳이다. 부소산은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을 만큼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태자골 숲길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_출처 : 부소산성


궁녀사(宮女祠)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0년(660)에 신라와 당(唐)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되던 날 삼천궁녀(三天宮女)들은 적군(敵軍)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落花巖)에서 꽃처럼 떨어졌다. 이러한 삼천궁녀들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반월루(半月樓)
1972년에 세운 반월루는 부소산 서남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층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부여읍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수루(戍樓)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오래전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는데, 이 자리에 1972년에 반월루를 세웠다. 반월루는 부소산성의 옛 이름인 반월성(半月城)에서 따온 이름으로 반월은 멀리 흐르는 백마강의 모습이 마치 달과 같다고하여 붙은 이름이다.

부여 부소산성 군창지(扶餘 扶蘇山城 軍倉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부여 부소산성 동쪽 정상부(해발 98m)에 있다. 1915년 이곳 지하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 됨으로써 백제시대 군량(軍糧)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은 영월대(迎月臺)라 하여 넓고 평평한 광장인데, 1981년과 1982년 두차례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口”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 하였는데,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약 47cm 정도이다. 지금도 이 일때를 파보면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사비성 함락과 함께 멸망할 때의 비극적 역사를 말해준다. 군창이 있던 곳은 지금도 더러 발굴 되고 있는데. 이 군창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_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부여 부소산성 영일루 (扶餘 扶蘇山城 迎日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왕이 멀리 계롱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랏일 또는 일과를 구상 했다고도 전해지는 영일루는 부소산의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은 2층 누각이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던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렸다. 영일루는 앞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다.._출처 : 위키 백과


부여 부소산성 삼충사(扶餘 扶蘇山城 三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1
위기로 치닫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가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_출처: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발굴조사 당시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19년(1028)당시 정림사로 불렸음을 알수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_출처 : 문화재청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뜻의 글귀를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불러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웠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_출처 : 문화재청


부여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扶餘 定林寺址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08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로 254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있는 석조여래좌상의 전체 높이가 5.62m에 이른다. 지금의 머리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의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성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어 만든 흔적이 여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핀 모양이며, 중대 8각 받침돌은 각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하였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_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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