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보물 제147호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밀양강가 절벽 위에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지은 조선시대의 누각(樓閣)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 밀양군의 손님을 머물게 하던 밀주관(密州館)의 부속건물로,정면 5칸 측면 4칸에 기둥의 간격을 넓게하고, 마루바닥을 높여서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좌우의 건물이 층계와 복도로 연결되어 건물의 배치에 변화를 주면서도 균형을 유지 하였고, 전체적 규모는 한결 웅장해져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의 명성에 어울리는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의 영남루는 고려시대 말(1365년)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라시대의 절 영남사(嶺南寺)터에 같은 이름의 누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를 걸치면서 여러차례 중축과 임진왜란등 전란때의 화재, 역대 밀양부사의 중건 등을 거쳐 1844년에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인들이 영남루를 읊었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진주 남강의 촉성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의 하나로 불리기에 충분한 경관과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영남루를 중심으로 무봉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 천진궁(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7호), 아랑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 밀양읍성(경상남도 기념물 제167호), 박시춘 옛집, 밀양아리랑 노래비, 석화등 주변에 다양한 문화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가운데 현판인 영남루(嶺南樓) 글씨는 송하 조윤형이 썼다고합니다.
강좌웅부(江左䧺府)는 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큰)고을 이라는 뜻으로 귤산 이유원이 쓴 글씨입니다.
교남명루(嶠南名樓)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경상남북도을 통털어 교남지방이라함) 귤산 이유원 글씨 입니다.
용금루(湧金樓) :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있는 아름다운 누각
천진궁(天眞宮)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천진궁은 1665년(현종 6)에 건립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位牌)를 모신 공진관(拱振館)의 부속 건물로 사용 되었으나, 1722년(경종 2)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客舍)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현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여 우리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진궁은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檀君)의 영정과 위패를 중심으로 그 왼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야의 시조(始祖)왕과 고려 태조 위패를 오른쪽 벽에는 신라와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高王), 조선 태조의 위패를 각각 모시고 있다.
1957년에 대대적인 수리와 함께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을 만덕문(萬德門)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봄. 가을로 어천대제(御天大祭 : 음력 3월 15일)와 개천대제(開天大祭 : 음력 10월 3일)를 지내고 있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八作)의 주심포(柱心包)식 건물로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기둥을 세워 건물의 웅장함을 더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축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해방후 이를 복원하려는 지역민의 노력도 단지 옛 건물의 복원이 아니라 민족의 정통성 회복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이 지방민의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_출처 진천궁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조선중기의 고승으로 속명은 응규(應奎),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며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黙)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하였으며,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4년(선조 27)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진중을 네차례 들어가 휴전협상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우기고 했다. 전쟁이 끝나자 1604년(순조 37)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순했다.
해인사(海印寺)에서 입적하였고,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이동상은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국난극복 의지와 애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민이 뜻을 모아 1971년 4월25일 건립한 것이다._출처 :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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