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부산 금정산 고당봉

승학2 2017. 6. 15. 23:55

 

금정산(金井山)

부산 북쪽에 솟은 해발 801m의 산이다. 최고봉인 고당봉을 비롯하여 계명봉, 상게봉, 원효봉, 장군봉, 파리봉, 의상봉등 600m 내외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산 능선에는 곳곳에 노출이 심한 암반이 나타나며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동북쪽 기슭에 자리한 범어사는 678(문무왕 18)에 의상이 창건한 사찰로 주변에는 계명암, 내원암등 여러 개의 암자가 있다. 이 밖에도 금정산에는 금정산성·미륵암·정수암·국청사 등이 있고 상계봉 남쪽에는 석불사가 있다.

사적 제215호로 지정된 금정산성은 원래 동래읍의 외성으로 축성되어 동래산성으로 불렸으나 금정산성으로 개칭되었다. 산성은 임진왜란 후 당시 경상감사의 진언으로 1703(숙종 29)에 축성되었고 그 뒤 다시 증축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1972년부터 2년 간에 걸쳐 동··3문과 성곽 및 4개의 망루를 복원하면서 둘레 17,336m, 높이 1.56m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이 되었다. 금정산 주변에는 높이 12m의 마애여래입상, 자연굴인 은동굴, 케이블카 시설, 식물원, 금강공원(金剛公園), 산성마을, 동래온천 등이 있다.

 

범어사 매표소에서 청련암을 거쳐 올라가면 사배고개 팔각정을 만난다. 여기서 계명봉과 장군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좌측으로 고당봉 가는 갈림길에서 양산 가산리 소재 마애여래입상을 보기위한 길을 택하였다. 

 

 

청미래덩굴(앵감나무)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

 

이 불상은 범어사(梵魚寺)의 북쪽 금정산의 화강암 절벽에 있다. 마애불은 높이 12m, 폭 2.5m나 되는 거대한 여래 입상이다.  마애불의 주변에 축대가 남아있고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에 새겨진 불상은 오랜 세월의 비 바람으로 심하게 마멸된 데다 바위에 균열이 많아 원래의 모습은 알기는 어렵다 다만 각 부분별로 약간의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쓴 듯한 흔적이 남아있다. 눈초리를 치켜 올린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과  큰코  꽉 다문입  어깨까지 내려온 귀등은 다정하고 자비로운 부쳐의 모습이라기 보다 오히려 위엄을 갖춘 수호신(神將)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손 모양(手印)이나 옷자락(法衣)의 형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남아 있는 옷자락의 주름 모양은 불상에서 볼수 있는 일정한 양식에 따르지 않고 이리저리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있으며, 두 개의 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 설명문에서

 

 

 

 

 

 

 

 

 

 

 

 

 

 

 

 

 

 

 

고당봉에서 내려올때는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금샘(金井)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62호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산2-1

 

금정산맥은 경남양산시 다방리에서 시작하여 장군봉을 거쳐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801.5m) 그리고 원효봉, 금정봉, 백양산, 승학산에서 다대포 몰운대로 이어진다.

금정산 유래는 1432년에 편찬한 “세종실록비리지”와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금정간 서북산정에 바위가 있는데 샘은 둘래가 10자(3m)남짓하며 깊이는 7치 (21cm)쯤 된다. 물이 항상 넘쳐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빛깔은 황금과 유사하다.

옛날 황금색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헤엄치며 놀았으므로 금샘이라 불렷고 범어사의 창건 설화가 시작된 곳이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 었고 황금색 물고기가 노닐던 금샘은 생명의 원천. 창조의 모태인 다산을 기원하는 성소였다.-출처 설명문에서

 

금정산성 북문(金井山城 北門)

사적 제215호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1-1

 

북문은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는 “초봄(1808년)에 오한원 부산의 지휘로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깍아내어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萬)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북문의 초루(譙樓)가 완성되었다“고한다. 성문 광장 세심정 일대에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운동(1919년)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사와 독립운동관계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출처 설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