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북한 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 남침하여 3일만에 서울이 함락 되었다. 국군은 미군 및 UN군의 지원을 얻어 낙동강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맥아드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백만명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도선을중심으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쟁중에 늘어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하여 1951년부터 거제도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포로 15만명 중공군 포로 2만 총 17만 이상을 수용하는데 이중 300 여명의 여자포로도 있었다고 한다.
1951년 7월 10일 최초로 휴전회담이 개최하였으나 전쟁 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격다가 동월27일에 휴전협정조인으로 전쟁은 끝났고 수용소도 폐쇄되었다. 풍요로움의 세대에 사는 우리 모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역사를 보면서 6.25 전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기습 공격을 개시하여 불법 남침을 감행 하였다.
우리 국군은 노도와 같이 밀러오는 북한군을 맞아 진퇴를 거듭 하면서 전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되자 피난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타고 자유을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난의 에 올랐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은 규정된 통제와 규율속에서도 제네바 협정에 의거 자율적인 내무생활이 상당부분 허용 되었다.
국군과 유앤군의 강력한 반격과 공세에 밀려 많은 북한군이 투항하였으며 생포된 포로들은 이후 대부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휴전과 함께 송환희망포로의 북송이 마무리 되었으며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드디어 석방되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국군들이 쓰고 있던 철모에 뚫린 총탄자국은 전쟁의 처참한을 보여주고 있으며 철조망을 걷어내는 국군과 북한군의 모습은 한민족간의 화합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 하였습니다.
이곳은 당시 포로들의 경비를 담당하던 사병들의 막사로써 아래쪽에 보이는 고헌 중학교에도 비슷한 건물 5동이 있으며 지금은 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