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實相寺)
사적 제309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찰 대부분 산속에 지어진데 반하여 남원시 산내면 들판 가운데 자리잡은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천왕봉(天王峯)을 마주한 이 절은 실상사사적기(實相寺事蹟記)에 의하면 통일신라 828년(흥덕왕 3)에 승려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서당(西堂)지장선사(智藏禪師)의 선법(禪法)을 받고 귀국하여 홍척은 실상사를, 도의는 보림사(寶林寺)을 창건하여 선종을 전국에 전파시켰는데 이를 실상산파(實相山派)라고 한다. 그의 제자 수철(秀澈)대사와 편운(片雲)대사에 의해 절이 크게 중창되고 선풍을 떨쳤다.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소실되어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1681년(숙종 7)에 벽암(碧巖)대사가 중수하고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1882년(고종 19)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黙)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1884년에 월송(月松)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인 가람배치는 대웅전인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탑이 2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평지이탑식(平地二塔式)이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 약사전. 극락전. 명부전. 칠성각 등이 남아있다.
또한 이 절에는 많은 중요문화재가 있는데 백장암 3층석탑(국보 제10호), 수철화상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3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실상사증각대사탑(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철조약사불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실상사약수암목각불탱(보물 제421호) 등이다.
실상산파(實相山派)
통일신라말 고려초기에 일어난 선문9산(禪門九山)의 하나. 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에서 개창했다. 제자로는 편운(片雲)과 수철(秀澈) 등이 유명하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서당(西堂) 지장(智藏)에게 사사했다. 홍척은 중국에서 귀국한 후 남악에 살면서 무수무증(無修無證)이라는 마조(馬祖)의 선(禪)을 보급했고, 홍덕왕과 선강(宣康)태자가 그에게 귀의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리산 실상사를 개창하여 실상산파를 형성했다.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연구한 것은 도의보다 늦지만, 귀국 후 가람을 창건하고 산문을 형성한 것은 실상산파가 최초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선종은 홍척을 초조(初祖)로 삼는다. 제자 수철은 2조이며, 밀양 형원사의 개조이다. 경문왕과 헌강왕이 귀의하므로 종풍을 크게 떨쳤고, 문하에는 음광(陰光)등 수백명이 있었다._출처 :브리태니커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37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이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짓어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높이는 8.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 아래 면은 수평이나, 윗면 모퉁이 부분은 위로 치켜 올려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은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 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있어 그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실상사 석등(實相寺 石燈)
보물 제35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석등은 기둥이 둥근 장고(長鼓)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과 다르다.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덟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실상사 건칠아미타불좌상 과 건칠보살입상
(實相寺 乾漆阿彌陀佛坐像, 乾漆菩薩立像)
전북 유형문화재 제258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건칠불은 흙으로 불상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나 삼베를 입혀 옻칠을 거듭한 뒤 채색하거나 도금한 불상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전기에 주로 만들어 졌다. 실상사 극락전에 봉안된 건칠아미타불좌상은 천을 10장 이상 겹치고 1cm 내외로 두껍게 옻칠을 하여 만들었다.
양발을 드러낸 채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는 이 좌상은 전체적으로 체구가 늘씬하다. 얼굴이 가름하고 둥글어서 이목구비가 부드러워 보이는 이 좌상은 가슴의 양감이 강조되어 있다. 승각기(僧脚崎)와 군의(裙衣), 군의를 묶은 띠 매듭과 옷 주름은 입체적이면서 자연스럽다.
한편 실상사 보광전에 모셔진 건칠보살입상은 본존불인 아미타불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입상은 허리가 길고 하체가 짧은 편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고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 눈. 코. 입이 단정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부분이 두드러지는 이 입상은 특이하게도 온몸에 화려한 구슬 장식을 두르고 있다.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鐘)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이 종은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든 것으로 높이 123cm, 넓이는 83cm이다. 종머리에는 용뉴라는 용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옆에는 한국 종의 전통요소인 용통이란 굵은 관을 달았다. 종 어깨의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새겼다. 네 개의 유곽마다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으며, 유곽들 사이에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용뉴와 용통의 장식이 간소하여 종의 밑자락에도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몸통에 새긴 딱딱한 선녀상을 볼 때 조선 후기 종의 장식이 형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_출처: 실상사



실상사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보물 제41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통일신라 말 지방의 여러 선종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 불상은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둘이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가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띤 이 불상은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라 신라 말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름하게 한다.








실상사 극락전(實相寺 極樂殿)
전북특별자차도 유형문화유산
이 건물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원래의 건물은 정유재란(1597년)때 불타버려 조선 숙종(1674∼1719)때 다시 지었다. 그러나 고종때 함양과 산청 출신 유생들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후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정(정)자 문살로 짠 문짝과 빗살로 짠 문짝을 번갈아 달아 다채로움을 더하였다.둥근 기둥은 위아래 굴기의 변화가 없고, 천장은 바둑판 모양으로 짜 넣었다._출처:실상사

건칠불은 흙으로 불상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나 삼베를 입혀 옻칠을 거듭한 뒤 채색하거나 도금한 불상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전기에 주로 만들어 졌다. 실상사 극락전에 봉안된 건칠아미타불좌상은 천을 10장 이상 겹치고 1cm 내외로 두껍게 옻칠을 하여 만들었다.

증각대사 탑비(證覺大師塔碑)
보물 제39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이 비석은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스님의 탑비이다. 현재는 비의 몸체는 없어지고 머릿돌과 받침돌만 남아있다. 받침돌에는 용의 모습이 아니라 거북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 하였다. 머릿돌에는 “응료탑비(凝廖塔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홍척국사의 탑비임을 알 수 있다. 비의 장식이 전체적으로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이어서 우리나라 고전 비석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_출처 : 실상사


증각대사 탑(證覺大師塔)
보물 제38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이 부도탑(浮屠塔)은 통일신라말 홍척(洪陟)스님을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경내에 함께있는 그의 제자 수철(秀澈)스님의 부도탑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홍척국사는 통일신라 현덕왕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서 826년(흥덕왕)에 귀국하여 선종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실상사를 처음열었다. 홍척국사의 입적 연대는 알수
없지만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며, 승탑 또한 이때를 즈음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탑 몸체에 새긴 문짝무늬는 윗부분이 반원형인데,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세밀하게 새긴 것이 눈길을 끈다. 지붕은 목조탑의 모습을 본따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탑의 높이는 2.4m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의 우수한 조각술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신라 신문왕이 시호를 “증각”으로 탑호를 “응료”라고 내려 증각대사 탑이라고 부른다._출처 : 실상사

수철화상 탑(秀澈和尙塔)
보물 제33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승탑은 승려의 사리를 모셔 놓은 탑으로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한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은 신라후기의 승려 수철화상(317∼893)의 사리를 모셔 놓은 탑이다. 수철화상은 본래 심원사에 머물렀는데 후에 실상사로 들어와 스승인 중각대사 홍척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그가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자 왕은 “수철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사리를 모신 탑을 “능가보월”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이 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조성하였으며 맨 아래 지대석에서 지붕돌까지 모두 팔각으로 이루고 있다. 기단의 아래 받침돌에 구름과 용. 사자 등의 무늬를 조각하였으나 모두 심하게 닳아 없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쉽지 않다. 위의 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삼중으로 조각해 둘렸다. 탑 몸체의 각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고 지붕돌에서 기왓골과 막새 기와(처마 끝에 놓는 암키와 와 수키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세부양식을 충실히 구현하였다. 탑의 꼭대기 부분은 층단 몇 개가 남아있을 뿐 나머지 부분이 없어져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에다._출처: 실상사

수철화상탑비(秀澈和尙塔碑)
보물 제34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 및 탑을 만들게 된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 탑비이다. 진성여왕 7년(893)에 그가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원래는 심원사의 승려였기 때문에 비문에 “심원사 수철화상”으로 쓰여있다. 비문을 짓고 쓴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쉽게도 현재는 비문의 글씨가 거의 닳아 없어지고 손상된 부분이 많아 완전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석의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서 마주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듯한 모습을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는 “능가보월탑비(楞伽寶月塔碑)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회명당대선사승탑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석종형 승탑이다. 자연 암반위에 만들어 졌으며 윗면에는 인도의 고대어인 범자가 새겨져있고, 탑의 가운데 ‘회명당대선서탑’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실상사 승탑(實相寺僧塔)
보물 제36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205-7
이 부도탑은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통일 신라시대 부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구성이나 조각을 다소 간략하게 처리한 점을 보아 고려시대에 만든 부도이다. 높이는 3.2m이며, 팔각 받침돌 아래쪽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를 조각하였고 중간부는 무늬없이 다듬었다. 받침돌 윗 부분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팔각몸체에는 한 면에만 문틀 모양을 조각하고 나머지 면은 전혀 장식히지 않았다. 급경살를 이룬 지붕 모퉁이에 꽃모양을 새겼다. 전체적인 모습은 간소하고 소박하나 절제되고 균형잡힌 느낌을 준다._출처 : 실싱사





옛 기와탑(古 瓦 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중 가장 먼저 개창한 유서 깊은 사찰인 “실상사(實相寺)”에서 출토된 기와들로 쌓인 것입니다. 실상사가 창건된 당시의 모습과 변천과정을 밝히기 위해 실상사와 남원시의 도움으로 지난 1996년∼2005년까지 국립부여 문화재 연구소가 발굴조사 하였고, 그 과정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의 기와 들을 모아 이 탑을 만들었습니다.

실상사 석장승(實相寺 石長栍)
국가민속문화재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이 돌 장승들은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작품으로 원래는 이곳 냇가에 모두 네 개가 있었다. 절로 가는 도중 내를 건너기 전에 두 개의 장승이 서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 것이 1936년 홍수에 쓸러 내려가 현재는 세 개만 남았다.
장승의 높이는 대략 2.5∼2.9m, 너비 40∼50cm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크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이 보인다. 장승에 새긴 가록을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영조1년(1725)에 새운 것들임은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굿기는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_출처 : 실상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