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수원 화성

승학2 2024. 5. 24. 09:25

수원화성(水原華城)

사적3호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 원침을 수원화산으로 옮긴 후 1796년 9월에 완성된 성이다. 수성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은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하였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청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을 정도로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는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정조 20년(1796)에 세웠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능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도,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을 이루어졌다. 화서문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 상을 받았다. 현판은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이 썼으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1948년(현종 14)수리하고 현재의 모습은 1975년 수리한 건물이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서일치(西一雉)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시설과 100m 이상의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서북각루에서 약55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꺽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을 가깝게 설치한 것이다.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로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에 이 르는 길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었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1975년),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다.

서이치(西二雉)

서2치는 서포루와 서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시설과 100m 이상의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2치는 팔달산 정상을 향하는 급한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어 규모가 작다. 붉은 빛을 띤 다양한 크기의 성돌이 잘 남아 있는데, 평지 성벽보다 규모가 큰 장방향 석재를 하부에 설치하여 하중을 지탱하도록 했다.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로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에 이 르는 길.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두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상산 봉화와 현륭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이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윗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윗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 와 시문(詩文) 현판은 모두 정조 작품이다. 1795년 성조가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 글씨를 직접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지은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正祖御製  華城將臺 親閱城操有詩

정조가 화성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지켜본 후 감회를 읊은 시

 

정조는 1795년 수원행차 넷째 날인 윤2월 12일에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외영”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튼날 새벽까지 실시된 군사훈련을 참관한 후 정조는 군사들을 칭찬하고 견고하게 쌓은 화성 성곽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날의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짓고, 이 시를 현판에 새겨 서장대에 걸도록 하였다. 본래 서장대 2층에 게시되어 있었으나 복제본은 1층에 두었다. 원본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 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서노대(西弩臺)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인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을 깍아 마감하였다.

서암문(西暗門)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꺽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시설을 두지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서남암문. 서남포사(西南暗門. 西南舖舍)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에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남포루(南舖樓)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 했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작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르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은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남치(南雉)

남치는 남포루와 팔달문 서쪽 남서적대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화성에는 성벽 8곳. 용도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남치는 서쪽 경사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치성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다. 서3치와 마찬가지로 치성 안쪽에 돌로 담을 쌓고 출입구를 냈는데 이 구조는 적대와 비슷하다. 남치는 원형이 잘 남아있다.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八達)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팔달문 주변은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화성축성 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규모와 형식은 장안문과 같다. 1794년 2월28일 장안문과 같은 날에 터 닦는 일을 시작했지만 대체로 장안문보다 공정별로 약 1주일 늦게 완성하였다. 강원도 출신 목수 윤사범이 다포를 짜 맞추고 일을 담당했는데, 이 목수는 훗날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를 담당해 근 100년 만에 화성에서 재현했던 다포 건축기술을 이어 나갔다. 팔달문은 축성당시의 건축물 뿐만 아니라 공사 감독과 석공의 이름을 새긴 실명판, 현판까지 원형으로 남아 있다. 2013년에 처음으로 문루 전체를 수리 했는데 훼손된 목재는 최대한 재사용 하였다. 부재에 남겨진 전통기술 흔적까지 보존한 사례로 손꼽힌다.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다포 : 기둥과 기둥사이에 받침목재를 배열한 건축양식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호예를 두었다. 홍예란 무지개같이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높이 쌓아 적이넘어오지 못하게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명이 수문을 지킬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다.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댑했다.

1922년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다. 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설치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자(一)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불렀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루바닥으로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쏘는 구멍을 냈다.

봉돈(烽墩)

봉돈은 봉화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다. 보통 봉화대는 높고 인적이 드문곳에 두었으나 화성에서는 시야가 트인 동쪽에 설치해 화성행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봉돈은 외벽과 내부, 계단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벽돌로 만든 화성의 대표적인 벽돌 건축믈이다. 높게 쌓은 대(臺) 위에 햇불구멍인 화두(火竇) 다섯 개가 있다. 평소에는 남쪽 끝에 있는 화두 한 곳에만 연기를 올리고 상항에 따라 연기숫자를 증가시켜 전쟁시에는 다곳 모두 연기를 피웠다.

*봉수제도 : 변방에서 일어난 위급한 일을 낮에는 연기, 밤에는 햇불을 이용하여 서울로 연락하는 군사 통신제도

동일포루(東一舖樓)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1795년(정조 19)에 창건한 수원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옹성은 서울의 홍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 창룡문 옹성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의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있다. 한국전쟁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치성 : 성벽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수 있도록 만든 시설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睥睨)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시 계단을 추가했다.

東北舖樓(角巾臺)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장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 보여서 ‘각근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췄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甓磴)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 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다.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동북각루(東北角樓)

보물 제1706호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龍頭)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명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헌륭원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은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북수문(北水門)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華虹門) ’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花紅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현종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전회’를 주축으로 수원주민이 힘을 모아 10년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홍예문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는 장안문에만 남아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은 현안(懸眼)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 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 누각은 네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손되어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옹성 : 서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밖에 쌓은 작은 성

북옹성(北甕城)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를 설치하여 화공을 대비했다. 오성지는 화성에서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북포루(北舖樓)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 라고도 불렀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 제1710호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 서북쪽 성벽이 꺽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외벽에는 화포를 쏠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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