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삼척 죽서루

승학2 2021. 10. 24. 14:59

 

 

 

이 죽서루는 건물 자체의 오래된 역사나 웅장함 뿐만아니라 오십천(五十川)이 감돌아가는 절벽위에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어 주위의 뛰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관동 팔경 중 제1경으로 꼽혀 사시사철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서루(西樓) 혹은 죽루(竹樓)라고도 일컬어진 죽서루가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건립 건립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누각 동쪽에 옛날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다. 또 일설에는 죽죽선(竹竹仙)이라는 명기(名妓)의 집이 누각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죽서루라고 이름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고려 명종 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12세기 후반 이전에 창건되었음은 분명하다.

 

 

 

 

누(樓)아래의 17개 기둥 중 아홉 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 할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죽서루기(竹西樓記)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아난 곳이 여덟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氣)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아 우뚝 솟기도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 북쪽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남쪽 경계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움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 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해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름 암벽으로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림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시대에 지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영락(永樂)원년(1403:태종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이 페허된 옛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원년(1425:세종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성종2)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처마를 덧대어 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19년(1591:선조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현종3)임인년(壬寅年)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현종 3년(1662)임인년(壬寅年) 월 일

                     행도호부사 허목이 기문(記文)을 쓰다.

※.현판에는 김효종(金孝宗)으로 되어 있으나 김효손(金孝孫)이라야 맞다.

김효손은 1373년에 태어나 1429년에 세상을 떠났다. 태종2년(1402) 정월에 삼척부사로 왔다가 태종4년(1404) 2월에 갔다._출처:죽서루

용문바위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사후(死後)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 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바위이다.

 

그후 용문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북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며, 동쪽 옛 연근당 자리 가까이에 있는 바위문, 행초서로 “龍門”이라 새긴 음각글씨가 남아 있다._출처 : 죽서루

죽서루 선사 암각화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物象), 기호(記號). 성혈(性穴)등을 그리거나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위에 여성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은 성혈암각이다. 성혈은 선사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칠월칠석날 자정에 아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구멍에 좁쌀을 담아놓고 치성을 드린다음 그 좁쌀을 한지(韓紙)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다. 성혈의 제작은 암반을 쪼아 깊이 판 다음 원형의 돌 또는 나무로 연마, 구멍을 넓혀서 만든다. 죽서루 경내의 성혈은 죽서루 동쪽 용문바위 위에 직경 3∼4cm, 깊이 2∼3cm 크기이며 모두 10개이다.

 

송강 정철가사의 터 표석

문화관광부서에서는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정하고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표석을 2개소에 세웠다. 하나는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 8경의 하나인 산척 죽서루 경내이고,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 부근이다.

삼척과 담양에 세워진 “송강 가사의 터”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詩碑)와는 다른 팔각형의 장대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 졌는데 기단 8각의 각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미니박물관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_출처: 죽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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