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봉암사
문경봉암사(聞慶鳳巖寺)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희양산 봉암사는 879년(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처음 지었고, 2년 후인 881년(헌강왕 7년)에 왕이 봉암사란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 절은 구산선문(九山禪門)가운데 하나인 희양선문(曦陽禪門)으로 잘 알려져있다. 절의 이름이 봉암사인 이유는 희양산의 백운대 계곡에 계암(鷄巖)이라는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암사을 처음 지을 때 닭이 그 바위 위에서 매일 새벽마다 시간을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국의 절에 대한 조선시대의 기록물 “가람고(伽藍考)”에는 봉암사 극락전에 경순왕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피난할 당시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극락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사라졌는데, 고려 935년(태조 18년)에 정진국사가 다시 지었다. 1431년(세종 13)에는 기화(己和)스님이 이 절을 고쳐 지었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썼다. 그 후 다시 불이 나서 무너져 건물이 없어졌다가 1674년(현종 15)에 신화스님이 고쳐 지었고, 1915년 세욱스님이 법당을 다시 고쳐 지어 오늘날에 이른다. 봉정사의 부속암자로는 극락전 뒤편에 있는 동암(東庵), 채마밭에 맞닿아 있는 휴휴암(休休庵)이 있다. 또한 희양산 아래에 있는 백운대(白雲臺), 백련암(白蓮庵), 환적대(幻寂臺), 월봉토굴(月峯土窟), 용추암(龍湫庵) 등도 봉암사에 딸린 암자들이다.
현재 봉암사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는 신라말기의 문신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四山碑文)중의 하나인 지증대사탑비가 있다. 보물로는 지증대사탑. 봉암사 삼층석탑. 정진대사탑. 정진대사탑비. 봄암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마애미륵여래좌상. 일주문이 있다. 그리고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는 환적 지경탑. 함허당 득통탑. 석종형부도이다.
한편 봉암사는 한국 현대불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의의가 있는 장소이기도하다. 1947년 10월 봉암사의 스님 10명이 모여서 만든 단체인 봉암결사(鳳巖結社)는 “부쳐님 법대로살자”는 정신으로 3년간 다양한 개혁과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스님들이 봉암사로 모여 들었고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현재 봉암사는 평소에는 참배객이나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부처님 오신날에만 문을 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오직 참선과 정진에만 몰두하는 간화선(看話禪)수행원이 있는 절이다._출처 : 봉암사
봉암사일주문(鳳巖寺一柱門)
보물 제2202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591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되어 있어서 일주(一柱)라는 이름이 붙였는데 모든 진리가 하나라는 뜻이다. 봉암사 일주문은 일주문을 만들 때 특별히 갖추어야 하는 특징에 맞추어 세웠는데 그 모습이 매우 소박하다. 1900년대 사진을 보면 일주문을 세운 시기를 18세기 전후까지 추정할수 있는데,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봉암사는 신라말에 세웠다. 고려 때 희양산 선문의 중심 사찰이었고, 조선시대 때 힘허 득통화상이 다시 지었다. 봉암사에는 많은 전각과 석조 유물이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목조 건물로는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과 봉암사 일주문이 가장 오래되었다.
*희양산 선문(曦陽山 禪門) : 희양산 봉암산에서 성립된 종파로 선종 9산문(九山
門)의 하나이다. 9산문은 통일신라 이 후 불교가 크게 흥할 때, 승려들이
중국에서 달마의 선법(禪法)을 받아 가지고 와 그 문풍 (門風)을 지켜 온
아홉 산문을 이른다. 희양산파라고도 한다._출처 : 봉암사
봉암사마애미륵여래좌상(鳳巖寺磨崖彌勒如來坐像)
보물 제 2108 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54-1
마애불은 바위벽을 다듬어 부처의 모습을 새긴 불상이다.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은 조선 현종 4년(1663) 봉암사에 머물렸던 환적 의천(義天)이 백운대에 조각한 미륵불상이다.
마애불의 크기는 높이 4.5m, 폭 4.4m로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도 비교적 큰 편이다. 머리와 몸체를 다른 조각 수법으로 만들었는데, 머리는 입체적으로 조각하고 머리 주위를 약간 파내서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과 광배를 겸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만면 몸체는 입체로 조각하자 않고 선으로 가늘게 새겼다. 머리에는 중앙에 꽃무늬가 있는 보석 왕관을 쓰고 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가지를 받치고 있다.
몸체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만든 시기와 조각가 그리고 이름이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있어 조선후기 마애불의 기준작으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_출처 : 봉암사
광배(光背)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모습
결가부좌(結跏趺坐) : 완전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 자세.
봉암사삼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보물제 169호
봉암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은 높이 631cm, 이형 석탑으로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있으며, 상륜부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드문 예이다. 넓은 지대석 위에 있는 1단 굄이 기단을 받치고 있는데 기단의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가 새겨져 있고, 갑석 밑에는 부연(附椽)이, 윗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다른 돌로 구성되었으며 옥신에는 각 층마다 우주를 새겼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1.2층이 5단이고, 3층은 1단이 줄어든 4단이며 처마 끝부분은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다. 상륜부에는 2단을 나타낸 노반 위에 반구형의 복발.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으며 철간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석탑은 879년 지중대사에 의해 봉암사가 개산될 때 건립된 것이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아지고 기단이 단층인 점, 옥개석 받침이 줄어든 점 등에서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형식을 보여준다._출처:브리태니커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
보물제 137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복리 485
봉암사 서북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341cm, 봉암사를 개창한 지증대사 지선의 사리탑으로 현재 옥개석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의 하나로 4각형의 대리석 위에 있는 8각형의 굄이 기단부를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1단으로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 1구씩 배치했다. 중대석은 일반적인 형식과 달리 구름무늬와 갑석형으로 된 2단 굄이 받치고 있다. 갑석은 각 모서리에 권운문(卷雲紋) 모양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迦陵頻迦)를 1구씩 조각했다. 중대석의 8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보개(寶蓋). 보주(寶珠). 영락이 장식된 탁자 위의 사리합(舍利盒)을 비롯하여 무릅을 끊고 공양하는 합장공양상. 악기를 연주하는 공양상 등을 조각했다. 상대석 밑에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를 둘렸으며 그 위에는 난간형 받침대를 마련하고 각 모둥이마다 기둥 모양이 세워졌다. 탑신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를 새기고, 앞. 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비(門扉)와 좌우에는 각각 사천왕상을 표현하고 나머지 2면에는 보살상을 조각했다. 옥개석은 탑신이나 기단부에 비해 폭이 넓으며 처마는 편평하게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약간 위로 반전(反轉)되었고 귀퉁이마다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을 장식했다. 상륜부에는 8각의 노반(露盤). 원형의 복발(覆鉢). 보주 등이 남아 있다. 이 부도는 탑비에 의해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비)
국보 제 315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뤈복리 485
이 비(碑)는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智證大師)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신라 경애왕(景哀王) 원년(924)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 승려 석혜강(釋慧江)이 썼다. 용모양의 비머리(螭首)와 귀부(龜趺)를 완전히 갖춘 비석으로 귀두는 용두형화(龍頭形化) 되었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으로 널리 알려진 비이다. 지증대사는 속성이 김씨(金氏)이고 호는 도헌(道憲)이다. 신라 헌덕왕(憲德王) 16년(824)에 출생하여 17세에 부석사(浮石寺)로 출가하면서 승려가 되었다. 그가 헌강왕 8년(882)에 봉암사에서 향년 59세로 돌아가자 나라에서 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고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는 동시에 탑비(塔碑)를 세우도록 하였다._출처 : 봉암사
봉암사극락전(鳳巖寺極樂殿)
보물 제1574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591
문경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헌강왕 5년(879)에 건립되었다. 신라와 후백제의 전쟁 때에 경순왕이 이곳에 피난을 와서 원당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후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대사가 고쳐 지었다. 현재의 봉암사는 임진왜란 때 거의모든 건물이 불에타 버렸다가 이후 복원한 모습인데, 이곳 극락전과 일주문만은 소실 되지않았다고 한다. 문경 봉암사 극락전은 처마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목탑형 양식의 건물이다.
현재 봉암상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원형도 잘보존하고 있다. 기단과 초석은 고려왕조의 양식이고 하층 처마는 높은 단청 몸체에 처마를 둘러 중층 외관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특히 건물의 맨꼭대기 부분은 목탑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원당(原糖) : 궁사(宮司)또는 민가에 베풀어 왕실의 명복을 빌던곳.
어필각(御筆閣) : 임금이 손수 쓴 글씨를 보관하던 전각._출처 : 국가유산청
봉암사정진대사탑비(鳳巖寺靜眞大師塔碑)
보물제 172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1-2
이 비는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정진대사(878∼956)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고려 광종 16년(965)에 건립된 탑이다. 이 탑비는 높이 2.73m, 폭1.64m, 두께 0.26m로 고려초기의 조형미를 잘 나타내며, 귀부와 이수의 형식은 일반적인 방식을 취했으나, 비좌(碑座)가 두드러지게 큰 것이 특징이다. 필체는 구양순체 해서이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李夢遊)가 지었다. 대사는 지금의 충남 공주 출신으로 성은 왕씨이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였고 경애왕 원년(924) 7월에 돌아와 봉암사에 자리잡았다. 경애왕은 그를 상당히 예우하였으며 고려 태조. 헤종. 정종도 그의 학식을 존경하였고 광종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를 맞이하여 사나신원에 모시고 보살로 예우하였다. 그는 광종 4년 봉암사에 들어가 965년 8월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고 왕은 사신을 보내어 법호를 정진이라 하고 탑의 이름을 원오라 하였다.
이미지 출처 :국가유산청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
보물제 171호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1-1
봉암사 입구 북쪽산 중턱에 있는 높이 500cm인 이 탑은 고려 초기의 고승인 정진대사 긍양의 사리탑으로 8각의 높은 지대석 위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차례로 놓여있는 전형적인 8각원당형 부도이다. 탑신부에 비해 옥개석이 크게 표현되어 전체적인 비례에서 다소 균형감을 잃고 있다. 기단은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졌는데, 하대석은 상. 하 2단으로 하단의 각 면에는 안상을 1구씩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부연이 있는 갑석이 있다. 갑석 위에는 구름무늬가 조각된 1단 굄이 상단을 받치고 있다. 상단 각 모서리에는 구름무늬로 장식된 기둥을 세우고 그 사리에 구름무늬와 쌍룡문을 배치했다. 중대석은 1면에만 보개. 보주. 보산(寶傘)이 장식된 사리합이 탁자 위에 놓여 있 는 것을 조각하고, 나머지 7면에는 특이한 꽃 모양의 안상을 조각했다. 상대석의 밑에는 2단의 받침을 각출하고 그 위로 양련을 조각했다. 상대석 위에는 갑석이 덮어 있으며 그 위로 난간 형태의 높은 2단 받침대가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석은 기단부와 옥개석에 비해 폭이 좁아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한 면에만 자물쇠가 달린 문비를 조각하고, 다른 면에는 우주만 새겼다. 옥개석은 처마 끝의 반전이 심하며 3단 받침과 부연이 받치고 있다. 윗면에는 기왓골은 없고 굵직한 우동만 표현되어 있다. 상륜부는 현재 양화와 보륜만이 남아있다. 이 부도는 정진대사원오탑비에 의해 965년(광종 16)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중대사적조탑과 양식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8각원당형 부도를 기반으로 했지만 불안정하고 둔중한 비례감, 기단부의 장식성, 옥개석의 귀꽃장식, 옥개석 뒷면의 기왓골 표현이 생략된 점 등에서 시대적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_출처: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