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해남 미황사

승학2 2021. 4. 16. 23:30

해남 달마산 미황사

(海南 達摩山 美黃寺)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

 

백두대간에서 이어진 소맥산맥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산이 달마산(489m)이다. 해남군. 현산면. 송지면. 북평면에 걸쳐있고 천년고찰 미황사와 어우려져 경관이 빼어나다. 산 이름은 경전(Dharma, 達摩)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에서 비롯 되었다. 현대의 지형도에는 “達馬山”으로 표기 되어 있다.

산 능선은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통불통한 기암과 괴봉이 12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풍광이 수려하고, 힘찬 기상과 장엄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 그리고 석양 빛 세가지가 조화를 이뤄 아름답다. 특히 미황사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남도 제일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황홀하다. 이렇듯 수려한 산세가 아름다운 곳에 미황사가 있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의조(義照)가 창건 했다.

 

사작비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있는 금함(金函)속에는 화엄경. 법화경.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40성중(聖衆). 53선지식(善知識). 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불(一萬佛)을 모실만 하다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美)자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黃)자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 설화는 “금강산오십삼불설화”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타고, 기록마저 없어졌다. 이후 1598년 만선스님이 중창하고 2010년 현공스님이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12개의 부속암자가 있으으며, 조선시대에는 연담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승풍(僧風)을 크게 떨쳤다.

해남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해남 미황사 응진전(보물 제1183호). 미황사 괘불탱(보물 제1342호)등 국가지정문화재 3점이 있다._출처 : 미황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남 미황사 대웅전(海南 美黃寺 大雄殿)

보물 제947호

 

미황사 대웅전은 잡석을 쌓은 높직한 기단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의 기둥을 세웠다,. 그 위에 공포는 내사출목. 외삼출목의 다포식으로 결구했다. 제공의 쇠서는 위로 가볍게 올라간 모양으로 18세기 이후의 보편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3칸 규묘이다.

 

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벽화로 장엄되어 있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1천 분의 부처님 덕분에 이곳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가지 소운이 이루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니 세 번 절하면 삼천 배가 되는 격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대웅보전은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중생계 부처님 세계로 건너는 배, 반야용선을 상징하기도 한다. 1601년에 재건 되었고, 1982년 중수할 때 중창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된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達摩山美黃寺大法堂重修上樑文)”에 영조 30년(1754)에 중건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상량문이 묵서된 종도리는 해체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_출처 :다음백과. 미황사

 

 

해남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海南 美黃寺 大雄殿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3호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의 협시불인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1640년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본존불이 협시불보다 살짝 클뿐 세불상이 거의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같은 조각승이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반쯤 뜬눈, 자그마한 백호, 형식화된 옷주름의 표현등으로 볼 때 17세기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조각승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존 상태가 좋으며 17세기 조각유파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_출처 : 미황사

 

 

해남 미황사 괘불탱

(海南 美黃寺 掛佛幀)

보물 제1342호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하는데, 미황사 괘불탱은 화면 가득히 본존불을 배치하고, 아랫부분에 용왕과 용녀의 모습을 그렸다.

크기는 길이 1170cm, 폭 486cm로 화면 가득히 본존불을 강조한 뒤, 아랫부분에 용왕과 용녀의 모습을 그렸다. 본존의 얼굴은 귀·눈·입·코 등이 작으며, 정수리 부분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윤곽선만 표현되었고,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안에 입은 옷은 가슴을 드러내어 허리부분에서 띠매듭을 묶었고, 옷은 격자무늬를 장식하여 18세기 후반기 그림에서 보이는 문양을 엿볼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영조 3년(1727)에 탁행·설심·희심·임한·민휘·취상·명현 등이 그렸는데, 본존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녹색과 적색의 밝은 선염(渲染)과 녹두색·분홍·황토색이 사용되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_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남 미황사 웅진전(海南 美黃寺 應眞殿)

보물 제1183호

 

응진당은 석가모니 제자 중에서 아라한과(모든 번뇌를 완전히 끓어 열반을 성취한 사람)를 얻은 뛰어난 제자들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당이 외벽 담을 두려고 있다. 응진당에는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둘레로 16나한상(전남유형문화재 제325호), 인왕상, 사자상, 동자상등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여준다. 응진당은 대웅보전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 불탔다가 1597년에 중창하여 1751년과 2001년에 중수하였다.

응진당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해 질녁에 진도와 주변 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_출처 :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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