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연곡사
구례 연곡사(求禮 鷰谷寺)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의 고승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연기조사가 처음 절의 터를 잡을 적에 이곳에 큰 연못이 있어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들이 노는 것을 보고 연곡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선종 사찰로 번성하여 도선국사, 현각선사, 진성국사, 영관선사, 소요대사 등 덕망 높은 훌륭한 승려가 주석(駐錫)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사찰이 모두 불탔으나, 소요 태능(1562∼1649)스님이 중창 불사하여 400여 스님들과 더불어 이곳에 총림을 개설하고 선풍을 일으켰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에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사찰은 항일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하여 완전 전소되었던 것을 1924년에 소규모 중창이 이루어졌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하는 수난을 겪었다.
1965년에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정부와 신도들의 지원을 받아서 구법당을 없에고 그 자리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채를 증축 하였다. 1995년에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웅전 뒤편에 있는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를 비롯하여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1호),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등이 있다. _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및 연곡사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求禮 鷰谷寺 三層石塔)
보물 제151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은 3층 탑신을 올린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전형적인 3층 석탑의 2중 기단과는 달리 석재 여러개로 3중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기단의 4면 모서리와 가운데는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맨 위의 기단이 넓은 데에 비하여 탑의 몸체인 탑신부가 줄어들었으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마다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다. 지붕 윗면의 경사는 경쾌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의 추켜올린 모습도 우아하다. 지붕돌이 밑에 떨어져 있었는데 1967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에 복원하였다. 이 때에 위층 기단안에서 동조 여래입상 1구를 발견 하였다. 탑에 사용한 돌의 구성 양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한다._출처 : 연곡사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求禮 鷰谷寺 東 僧塔碑)
보물 제153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승탑비는 승탑과 짝을 이루어 세운 비이다.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는 동 승탑 앞쪽에 서 있는 비이다. 비석의 몸돌인 비선은 없어지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머릿돌은 구름속에 용 5마리를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불꽃에 휩싸인 보주(寶珠)를 조각해 놓았다. 머릿돌의 세밀한 조각과 날개를 갖춘 받침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받침돌은 뿔이 하나 달린 용 모양의 머리, 날개 달린 거북 모양의 등을 갖춘 상상속의 동물인 “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용의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한 비좌(碑座)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로 장식해 놓았다. 동승탑과 짝을 이루어 만들어진 통일신라 시대의 비이다. _출처 : 연곡사
* 보주 :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이승 탑은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구례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등 2기가 더있다. 동 승탑은 그중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기단)은 세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단으로 나누어 두겹의 연꽃잎과 기둥 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테를 두르고 구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迦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특이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면네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 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 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수가 없으며, 일제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이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_출처 :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
이 승탑은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영곡사는 고려초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북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동승탑(국보 제53호), 구례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 승탑은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3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위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 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迦陵頻迦)를 돋을 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등을 꾸며 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끼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 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승탑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수 없어 “북 승탑”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은 그후인 고려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_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求禮 鷰谷寺 逍遙大師塔)
보물 제154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높이 360cm, 이 부도는 탑신석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과 “순치6년 경인(順治六年庚寅)”이라는 두 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어 소요대사가 죽은 다음해인 효종 원년(순치 6년, 1950)에 건립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 탑은 사리를 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기단을 두고, 위로는 머리 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3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의 몸돌에는 한 면에만 문짝 모양을 새기고 다른 곳에는 인왕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지붕돌은 귀통이 여덟 곳에 큼직하게 꽃장식을 얹어 두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에는 봉황 4마리가 완전하게 남아있다. 영곡사에 있는 다른 탑 2기에 비해 조형성은 떨어지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운 탑이다.
소요대사 태능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하고 서산대사의 선맥을 이은 큰 스님이다._출처 : 연곡사
구례 연곡사 고광순 의병장 순직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1907년 11월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곳이다.
고광순(高光洵-1848∼1907)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1896년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에 참여하였다. 1906년 6월 최익현 · 임병찬 등이 일르킨 태인의병에 참여하려 했으나 태인의병이 해산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2월 양한규의병과 함께 남원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양한규 의병이 일본군에 패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07년 중반 연곡사에 근거지를 두고 지리산에서 장기항전을 벌리기로 계획하였으나 1907년 10월 17일 일본군의 기습으로 순국한 곳이다._출처 : 연곡사
구례 연곡사 현각선사탑비(求禮 鷰谷寺 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2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현각선사탑비는 고려전기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경종 4년(979)에 건립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비문은 학사 왕융(王融)이 짓고 글씨는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쓴 것이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웅장해 보인다.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은 큼직하며, 수염이 달린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 중앙에 비를 꽂아두는 부분의 안상(안상)에는 꽃 조각을 새겨 놓았다. 받침돌 위에 놓인 비의 머릿돌에는 여러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긴밀하고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비석 안으로 스민 물을 빼는 물구멍이 받침돌과 머릿돌 윗부분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앞면의 가운데에는 “현각선사비명(玄覺禪師碑銘)”이라는 비 이름이 새겨져있어 현각선사의 탑비임을 알수 있다. 형재의 탑비는 귀부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조각난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_출처 : 연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