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여주 신륵사

승학2 2021. 1. 4. 17:37

신륵사(神勒寺)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어느날 원효대사 꿈에 흰 옷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이 전하는 전설뿐 정확한 문헌 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는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남쪽 기슭에자리 잡은 고찰이다.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여주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기단위에 앞면 1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전기 예종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의 중앙에는 지공화상(和尙)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의 영정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라 한다. 앞면에는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 할수있게 하였고  옆면에는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사당은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조선전기의 조각 기법이 드러난 건물이다._출처 : 신륵사.

여주신륵사삼화상진영

(驪州神勒寺三和尙眞影)

경기문화재자료 제167호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은 신륵사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지공화상(?∼1363), 나옹화상(1320∼1376), 무학대사(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가운데에는 지공화상을 그 오른쪽에는 나옹화상을 왼쪽에는 무학대사를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이 삼화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화상의 정통성을 보여 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점의 진영 가운데 삼 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귀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_출처 : 신륵사

여주신륵사건륭삼십팔년명 동종

(驪州神勒寺乾隆三十八年銘 銅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종종은 1773년(조선영조 49)에 만든 동종으로 높이는 93.6cm이고 폭은 66.2cm이다. 용뉴가 쌍룡으로 되어 있고 조선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원형 범자*를 연곽**과 보살상 사이에 배치하거나 하대의 연화 덩굴무늬를 중간에 배치하는등 신륵사 범종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종에 새겨 기록을 통해 종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범종 형식과는 다른 다양성이 나타나므로 문화적 가치가 높다.

 

범자 :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적는데 쓰였던 브리흐미 문자.

연곽 : 종 몸체의 상부 아래쪽의 네 곳에 붙여 있는 연 봉오리를 감싼 네모진 테

명부전(冥府殿)

명부(冥府)란 사람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세계를 상징하고, 명부전에는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주불(主佛)로 봉안 되어 있어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단의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심에 두고 좌측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우측에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로 명부의 시왕들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판관(判官), 녹사(綠事), 장군(將軍)등의 존상(尊像)이 갖추어진 전각이다. 시왕은 죽은 자들의 사후에 생전에 지은 죄와 선행을 심판하는 10명의 판관이며,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시왕 가운데 다섯 번째 판관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안에 다른 세계로 태어나게 되는데 선망 조상들과 부모님들이 왕생극락 하도록 천도재 및 기도를 지내고 있으며, 명부전은 살아있는 후손과 조상을 위하여 부처님전에 복을 발원하는 전각이다._출처 :신륵사.

 

봉송각(奉送閣)

이 곳 천년사찰 봉미산 신륵사에 조선된 봉송각(奉送閣)과 소대(燒臺)는 신륵사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서 석탑 앞에 놓인 소래에 지극한 정성을 담아 남겨주신 동전 10여성상(星霜) 모은것과 배(박)영애  정영순 보살의 시주로 조성된 불사입니다.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의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殿閣)입니다. 이 불사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일체의 중생에 널리 퍼져 극락세계에 환생하고 무량수불에 수기를 받고 불도를 닦아 성불하여 지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8호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산113-1)

 

고려 우왕 5년인 1376년에 건립된 선각대사의 사리탑이다. 종 모양의 탑신을 안치한 단층의 탑으로 종수는 보주현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석종 형식은 인도의 불탑형식을 가미한 고려말기의 석종형 부도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이 석종의 크기는 높이 160cm  지름 110cm 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 앞 石燈)

보물 제231호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산113-1)

 

나옹선사의 묘탑 앞을 장식한 회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석등은 앙련과 복련을 새긴 기단위에 팔각의 화사석을 갖고 있는 석등이다. 화사석의 높이는 67cm, 지산전체의 높이 193cm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29호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산113-1)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 입적하였다. 이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모신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비석도 세웠다.

비는 3단의 받침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되어있으며,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몸체의 양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기와 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비의 형식이 잘 드려난 다. _출처: 신륵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이란 독성(獨聖)과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함께 모시는 전각(殿閣)을 말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독성은 율장인 “십송율”에 내용이 자세히 전하는데 부처님 당시에 빈두로존자가 인간세계에 보이지 않아야 할 신통을 보여준 이유로 부처님의 화상에서 추방되어 동쪽으로 가서 불법을 수행· 포교 하였던 내용을 한국 불교에서 수용하여  한국에서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 일컫는다. 천이백 아라한 가운데 한분이시며 신통력이 매우 뛰어났던 성자(聖子)로 말세중생(末世衆生)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인 산신령이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신(護法神)이라는 인격성이 부여 되었고 호랑이를 산신 자신이나 시자(侍子)로 표현하고 있으며  화엄성중 104위 중 71위 신장으로 복을 비는 중생들에게 작복(作福)의 인연을 맺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행경”에서 부처님이 혜안(慧眼)으로 살펴보니 산신들의 능력에 따라 좋고 나쁜 지역을 서로 나누어  자신이 거주하는 영토를 지배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전한다.

칠성(칠성)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신앙으로 명(命)줄을 관장한다고 믿어 가족들의 수명장수(壽命長壽)와 자손창성(子孫昌盛)을 구하는 신(神)으로 일반적으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라고 일컫고 있고 일광. 월광보살을 협시보살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두 보살님은 본래는 약사여래부처님의 좌우 협시보살이므로  옛날에는 질병과 가난에 많은 고통을 겪었으므로 이를 극복하고자 약사여래부처님을 칠성으로 대치하는 신앙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삼성신앙은 한국불교의 특색에 맞게 발전  융화된 한국적 불교 신앙이라 볼수 있다._출처 : 신륵사

 

여주신륵사 극락보전

(驪州神勒寺 極樂寶殿)

경기도 시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3)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浮椽)을 달아 겹처마를 만들었고 기둥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栱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니다. 긴 장대석을 3벌로 정연하게 쌓은 기단과 계단도 조선조 사찰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의 기법들이다. 길게 뻗어 나온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가느다란 활주(活柱)를 시설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의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改金)한 불상들이다. 후불탱화와 우측의 신중탱. 감로탱은 모두 1900년 작품이고 좌측의 지장탱은 1908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법당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지만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짜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건륭 38년(영조49년.1773년)의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 _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주신륵사목조아미타삼존상

(驪州神勒寺木造阿彌陀三尊像)

보물제1791호

 

신륵사 삼존상은 아미타 여래를 보존불로 좌우에 입상의 관음과 대세보살상으로 구성된 아미타여래삼존상입니다. 1610년 아미타여래존불의 본존 높이149.5cm, 무릅너비 96.9cm 좌측 관음보살 높이177.5cm, 우측 대지보살 높이 174.2cm이다. 여래좌상으로 불상내부에서 복장원문이 발견되어 1610년에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에 의하여 제작 되었음이 밝혀졌다. 정확한 조성시기와 새로운 17세기초 조각승의 발견으로 발견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천송리 282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위에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린 것이다. 통일 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통일신라나 고려의 양식과 전혀 다르다. 기단에서 탑신부까지 전부 돌을 한 장씩 쌓는 방식을 취하였다. 바닥 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 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두꺼워 탑의 안정감을 높여주며 위층 기단 모서리에는 꽃모양이 새겨진 기둥이 있고 각 면에는 용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통이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일부 드려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벗어난 표현도 나타난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 하며  전체적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 석탑과 돌의 재질, 조각기법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1472년(조선 성종3)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탑도 이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_출처 : 신륵사

 

 

 

여주신륵사 대장각기비

(驪州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비는 고려말 신륵사에 대장각을 만든 후 그 내력을 새긴 것이다.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고려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 제학이었던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 제학이었던 권주가 썼다.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신도의 명단이 적혀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 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의 몸체를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형태로 되어있으며, 몸체의 양옆에 있는 돌기둥이 몸체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이렇게 비의 몸체 양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양식이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유행했던 거북 모양의 비 받침과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는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 되었는데  이비가 그러한 변화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려 말 비석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_출처 :신륵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이 탑은 화강암을 깍아 만든 3층탑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여주 신륵사 경내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基壇部)는 한 장의 넓적한 돌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에 덮개에 해당하는 상대석(上臺石)을 덮었다.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있는 탑신(塔身)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로 옥개석(屋蓋石)을 덮었다. 옥개석은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 내지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형태로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쌓여 있으나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고려후기 나옹화상(懶翁和尙)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시대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_출처 :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천송리 282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이중의 반원 사이에 연주문(連珠紋)과 당초문(唐草紋)을 조각하였으나 배치가 일정하지 못하며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데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에 면토(面土)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개  보주 등이 얹혀있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 2년(1726)에 고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_출처 : 신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