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공산성 위을 걷다

승학2 2020. 12. 5. 01:31

공산성(公山城)사적 제12호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로 280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써 성벽의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의 이름을 처음에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렸다.

백제 무왕 31년(630)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었으며, 660년 백제 멸망기에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624)때에는 인조가 이성으로 피난하였다. 성안에는 백제시대 추정되는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등 백제왕궁 관련 유적과 4곳의 문지(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錦西樓 入口 碑石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_출처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공상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서문은 본래 유지만 남아 있었으나,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롯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_출처 : 공산성

 

 

공산성 백제 왕궁지(公山城 百濟王宮址)

백제 왕궁지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터이다. 공주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높은 지대에 있는데 1935년에 기마병 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그 후로 1985년까지는 전국자전거대회를 여는 등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왕궁터 주변을 평평하게 만드는 큰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백제시대 기와와 토기, 청동거울 등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공산성 백제 연못(公山城百濟蓮池)

백제 연못은 공산성 왕궁터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인공연못이다. 빗물을 받아 저장하여 연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화재가 났을 때는 소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연못의 지름 약 9.5m 정도로 땅을 판 후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너비가 40∼50cm 정도 되는 얇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깔았다. 연못 벽 뒤에는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하여 1m 너비로 점토를 두껍께 채웠다. 연못 안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_출처:공산성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公山城 雙樹亭 史蹟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쌍수정 사적비는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비에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있다.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 숙종 34년에 지금의 비석을 세워졌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괄의 난 : 이괄(1587-1624)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된 인조반정의 보

                       상 과정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

 

공산성 백제시대 건물지

(公山城 百濟時代 建物址)

백제시대 건물지는 백제시대 왕궁의 일부로 사용된 건물 터이다. 동서로 38m, 남북으로 너비 5m 규모이다. 건물터에는 건물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앞면과 뒷면에 도랑을 파고 각각 240cm 간격으로 기둥을 배치하였다.

백제시대의 쌍수정 주변을 평평하게 만드는 큰 토목공사를 한 후에 만든 건물로 웅진시기(475∼538) 백제 왕궁의 중요한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랑을 파고 여러개의 기둥을 세운 것은 벽이 건물의 지붕을 지탱할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러한 건물을 벽주건물이라고 한다. 공산성 안에 있던 백제 왕궁지의 존재를 살필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공산성 쌍수정(公山城 雙樹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

 

공상성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영조 10)에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가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인조는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 즉 쌍수(雙樹)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오늘날의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의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_출처 :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터에는 영동루를,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_출처 : 공산성

 

*삼남 : 남쪽의 3도,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공산성 영동루(公山城 迎東樓)

공산성의 4개 성문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 하부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고, 문옆 양쪽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문지석을 원래 모습대로 찾아내었다. 발굴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2층 문루로 복원하였다. 잊혀진 문루의 명칭은 2009년 시민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라고 지었다. _출처 “ 공산성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왜(倭)로부터 보호해주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명(明)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提督李公), 위관 임제(委官 林濟), 유격장 남방위(遊擊將 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사은 송덕비(謝恩頌德碑)이다 일제 말기 이들 비석은 일인(日人)들에 의해 공주읍 사무소 뒤뜰에 매몰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비석은 선조37년(166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있다. 삼장비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 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하에서도 안전할수 있었고 임진년에 비로소 생업에 종사할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_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광복루(光復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

 

공산성 광복루는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누각이다. 공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공주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4월에 김구, 이시영등이 공주를 방문하여 이곳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 _출처 : 공주성

 

 

영은사(靈隱寺)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13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1457년(세조 3)에 세조의 명으로 창건하여 묘은사(妙隱寺)라 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을 일으켜서 한양을 침공하였을 때 인조는 이 절로 피난와서 안전하게 피신한 뒤 은적사라 하였다. 그뒤 인조는 이 절이 설험수호(設險守護)의 요지임을 깨닫고 이 절에 승병을 두게하여 호서지방 방비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의 승병활동과 함께 호국사찰(護國寺刹)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원통전(圓通殿),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큰 대방(大房)이 있으며, 대웅전은 청청남도문화자재자료 제51호로 지정되있다. 현재 이 절은 비구니의 수도처로 이용되고 있다. _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만하루(挽河樓)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5

 

공산성 만하루는 동편에있는 깊이 9m의 연지와 금강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적 기능이 중심되는 누각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성지조”와 “누정조” 부분에 1754년(영조 30) 충청감사 김시찬(金時粲)에 의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된 기록이 있다. 또한 공주판관 박사석(朴師錫)의 아들인 박윤원(朴胤源)이 쓴 “만하루기”에도 관찰사 김시찬이 규획하여 건립하였고, 그이름을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가 지은 “세병마(洗兵馬)”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만하루가 언제 훼철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나, “일성록(日省錄)”과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 등에 만하루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공산성내 유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공산성 만하루에 대한 건물지가 확인 되어 1984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목조 건물로 복원되었고, 2006년 보수 공사가 이루어 졌다. 또한 공산성 만하루 옆의 연지도 복원되었다. _출처:공주향토문화백과

 

 

공산성 공북루(公山城 拱北樓)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 36)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옆에 월파당을 함께 지었다. 여러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두었다. _출처 :공산성

 

공산성 공산정(公山城 公山亭)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는 정자이다. 공산성 안에있는 백제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국가등록 문화제 제232호)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볼수 있는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落照)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의 충청도 읍지 공주목지도를 보면 후락정(後樂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維新閣)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렸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 _출처 : 공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