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도산사원은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림이 건립된 것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향사하며 후학을 양성해 온 곳이다. 영지산(靈芝山)을 뒤로하고 동취병(東翠屛), 서취병(西翠屛)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 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선조 8년(1575)에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을 사액(賜額)하였다. 이 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 서원 철패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보존 정책에 따라 성역화의 대상으로 지정되어 보수하고, 유물전시 관인 옥진각(玉振閣)을 신축하여 퇴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도산서원 소유의 고서(古書) 1300여종 및 500여 책과 퇴계문집을 비롯한 목판 총37종 2790판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 진흥원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_출처: 도산서원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퇴계 선생은 서원 경내를 중심으로 양편 산기슭이 절벽을 이룬 동쪽을 천연대(天淵臺) 서쪽을 운영대(雲影臺)라 불렀다. 천연대는 시경(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고, 운영대는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돈다(天光雲影共徘徊)”라는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도산서당 일대를 엄숙한 수도의 장으로 꾸며 천리(天理)의 묘용(妙用)을 깊이 사색하고 자연의 심오한 참뜻을 깨우치기 위해 조성한 자연 체험장이다._출처: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지방 유형문화재 제33호
조선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인 장소이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_출처: 도산서원
열정(洌井)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로 역경(易經)의 정괘(井卦) “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에서 의미를 취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도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래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농운정사(隴雲精舍)
제자들의 기숙사로 서당의 서쪽에 위치한다.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 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漢字) “工”자 모양으로 퇴계선생이 직접 기본 설계를 하고 당시 용수사(龍壽寺)승려 법련(法蓮)과 정일(淨一)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하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_출처: 도산서원
도산서당(道山書堂)
도산서당은 선생이 몸소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57년에 착공하여 1560년에 완공하였다. 서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가 직접 기본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서당은 一자 형태의 단정한 3칸 건물로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다. 여기에 부엌 반칸, 마루 1칸을 더 달아 내었고, 건물 3면에 퇴를 놓아낸 점이 특이하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연장 하였으며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하였다._출처: 도산서원
서광명실(西光明室)
1930년(庚午年)에 동광명실을 본 따 지었으며, 동광명실과 함께 1,271종 4,917권의 각종 문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관리하고 있다._출처: 도산서원
동광명실(東光明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건물로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할수 있는 오늘날 도서관으로써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동광명실에는 역대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하였다. 진도문을 가운데 두고 동.서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樓閣式)으로 지었다. 서광명실은 근대에 들어 증건(增建)하였다_출처: 도산서원
동.서재(東.西齋)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로 지어진 건물로써, 동편 건물을 “박약재(博約齋),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고도 한다.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벽체 사방을 모두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아 습기방지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면 위쪽에 살창을 내어 통풍이 잘되도록 하였다.
퇴계의 문집, 유목,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 오다가 2003년 5월에 한국국학 진흥원으로 이관 되었다._출처: 도산서원
진교당 보수공사 장면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
조선 선조 7년(1574)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립된 건물로써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1칸은 원장의 거실로 온돌방이며, 명칭은 한존재(閑存齋)이다. 정면의 현판은 조선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1574년에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출처: _도산서원
옥진각(玉振閣)
도산서원은 1969년부터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 보수를 하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옥진각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완공되었다. “옥진”은 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인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옥진각에는 퇴계선생이 생전에 쓰던 많은 유물를 보관 전시하는 건물이다. _출처 :도산서원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황(李滉 : 1502∼1571)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 (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다. 6살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2살때 병을 얻어 집에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6세때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대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을 하기도 하였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공부했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고 여러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 수양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사잠”, “논어집주”, “주역” 등을 진강했으며 “성학십도”를 저술해 바쳤다. 1570년에 병이 깊어져 70세 나이로 돌아갔다.
48세때 단양군수로 부임했는데 고을 관기였던 18세 두향이 첫눈에 이황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 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이황도 부인과 아들을 잃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두향과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향은 외모며 글솜씨며 거문고 솜씨가 특출하여 이황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9개월만에 경상도 풍기 군수로 전근 발령되어 떠나는 짐속에 두향이가 수석 2개 와 매화 화분 한 개가 있었다고 한다. 두향이가 퇴계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를 잇고 지금도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서 그대로 꽃을 피우고 있답니다. 그가 두향을 단양에 홀로 남겨두고 말년을 안동 도산서원에서 지낼 때 어느 날 두향이 인편으로 난초를 보내왔답니다. 단양에서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채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습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로 소중히 다루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핏빛으로 변함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까지 4일간을 걸어서 찾아가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마감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에서는 두향이 묘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고 합니다.
역락서재(亦樂書齋)
역락서재는 서당제자들을 위한 기숙사로써 퇴계의 제자 지헌공(鄭思誠 1545-1607)을 비롯한 뜻있는 제자들이 힘을합쳐 세웠다. 온돌방의 서쪽 반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정한 건물로 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