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영월 장릉(莊陵)

승학2 2018. 6. 24. 17:53

장릉(莊陵)의 유래(由來)

사적 제196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월 제1)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대왕의 능이다세조 2(1456)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평진등이 상왕복위사건(丙子獄事)으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다음해 6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시던 중에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기셨다. 세조3(1457)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그 해 1024일 사사(賜死) 되었는데, 그 때 춘추(春秋)17세이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홍도가  옮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것은 달게 받겠다 “(爲善禍吾所甘心)”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하였다

 

중종 11(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王命)이 이었고, 중종36(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修築奉祭)하였다. 숙종24(1698)에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으로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석물들은 추복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厚陵)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 주의에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각각 1쌍씩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2, 석마() 1쌍이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다._출처 : 안내문

 

매년 4월 마지막 주말에 단종문화제가 성대하게 거행되며, 히 조선시대 국장 재현행사는 1천명이 넘는 인원과 49275식의 도구가 동원되어 장엄하게 재현된다. 2009630일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 됨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충신(忠臣) 박충원은 중종 26년(153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사후에 문경공(文景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 되었던 묘를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

 

 

 

 

 

 

 

 

 

 

배식단(配食壇)

이곳은 단종(端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출처 : 안내문

 

엄흥도 정여각(嚴興道 旌閭閣)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 때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觀風軒)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추증 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출처 : 안내문

재실(齋室)

이 건물의 처음 건립연대는 숙종25년(1699)이고, 1932년에 중건하였다.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메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 오던 곳이다. 1997년∼1998년 재실지붕 및 배수로를 보수정비 하였다.-출처: 안내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