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 및 주변 유적
신라 원성왕릉(新羅 元聖王陵)
사적 제26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번지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제위 785∼798)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12㎞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로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돋을 새김되어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좌우에 화표석, 문인석(文人石)과 돌사자(石獅子)를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등 모든 면에서 신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민간신앙의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의 성과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이며 내물왕의 12세손으로 효양(孝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박씨(朴氏)이고 비(妃)는 김신술(金神術)의딸 숙정부인(淑貞夫人)이다. 아들 인겸(仁謙), 의영(義英), 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왕은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碧骨制)를 고치기도 하였다.
경주 영지(慶州 影池)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261-1
영지는 경덕왕(景德王) 10년(751)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를 지을 때 옛 벡제지역의 출신 석공아사달(阿斯達) 과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 곳이다.
불후의 걸작인 다보탑과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여념이 없던 남편 아사달을 찾아 서라벌로온 아사녀는 이 연못가에서 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다 지쳐 못에 피친 탑의 환영(幻影)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물속에 뛰어 들었다. 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를 찾아온 아사달은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못에 뛰어 들어 죽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곳을 영지(影池)라 하였고 그 때 못에 그림자가 비친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치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못 가에는 옛날 두 사람을 위해 지은 영사(影寺)의 돌부쳐가 남아 있으며 늣가을 맑은 날 오후에는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의 그림자가 못에 비친다.
경주 영지 석불좌상(慶州 影池 石佛坐像 )
경북 유형문화제 제204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297-1
이 불상은 불국사 석가탑(釋迦塔 일명 無影塔)에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진 영지 곁에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아사달(阿斯達)이 아사녀(阿斯女)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은 몸체와 대좌,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높이는 광배를 포함하여 약 4.3m이다. 얼굴은 심하게 닳아서 눈. 코. 입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어럽게 되었다. 옷은 왼쪽 어깨에 걸쳤으며, 오른쪽 어깨는 드러낸 모습을 하였다.
왼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은 무릅 위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여 무릅아래로 내려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비록 신체 일부가 파손 되었지만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8세기중엽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주 수봉정(慶州 秀峯亭)
경북 기념물 제102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487 번지
이 정자는 구휼(救恤)사업 및 육영(育英)사업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의 지원(支援)을 펼친 현장(現場事業處)으로서, 수봉 이규인(秀峯 李圭寅 1859∼1936) 선생이 1924년 서당인 비해당(匪懈堂)과 약국(藥局)인 보인재(輔仁齋)를 갖춘 2층으로 건립하였으나, 1953년 현재와 같이 단층으로 개수 되었다.
선생은 사립(私立) 경주고등보통학교(慶州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여 구국(救國)의 인재를 양성하려 하였으나, 끝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수탈(收奪)되어 경주공립중학교(慶州公立中學校)로 개교 되고 말았다. 그러나 광복(光復) 후 선생의 유지(遺志)대로 사학(私學)으로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본 건물은 선생의 선각(先覺)과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배우는 도장(道場)으로서 그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