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양동마을
양동마을(良洞마을)
양동마을은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 형의 모양으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상류층 양반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 조선시대 가옥 150여 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종가(宗家)나 큰 기와집은 대체로 높은 곳에 있고 초가집은 평지에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청백리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을 배출되었다.
1984년 12월 20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 마을로 경주 손(孫)씨와 여강 이(李)씨 두 가문이 500년 넘게 전통을 이어온 마을이다.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한 양반가옥과 초가 160호가 집중되어 있다.
양동 마을의 특색
현재의 양동마을이 이루진 것은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1433∼1484)가 처가 마을에 살면서 부터이다.당시는 유교의 종법 질서보다는 혈연관계를 중시하던 시기로 남자가 혼인을 하면 처가 동네에 가서 사는 풍습이 있었다. 손소에 이어 그의 사위가 된 찬성공 이번(贊成公 李蕃 1463∼1500)도 양동마을의 처가로 장가를 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양동마을은 손씨와 이씨의 집성촌인 씨족 마을로 형선 되었다.
손씨와 이씨는 서로 좋은 터를 잡아 집을 지었고 오랜 세월을 거처 두 가문의 솜씨 있는 기념 건조물이 양동 마을 곳곳에 사이좋게 자리하게 되었다.
정충비각(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손종로(孫宗老)와 그의 충성스런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7년(1783)에 세웠다. 손종로는 광해군 10년(1618) 무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을 지낸 분으로 병자호란 때 이천의 쌍령전투에서 그의 노비인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과 관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이 집은 조선 성종때 문신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의 고택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마루에 올라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경관을 바라보게 하였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손소공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411호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인 희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의 종가 별채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 (無忝堂 李宜潤)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뒤쪽에 높게 서있는 건물이 사당이고 동쪽에 서있는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체이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祭廳)의 기능이 강했으며 남성들이 독서와 휴식 및 손님 접대를 하였던 큰 사랑채로도 쓰었다. 대청의 오른쪽 벽에 걸린 좌해금서라는 편액은 흥선 대원군의 글씨이다.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이 경상남도 관찰사로 재직할때 지은 것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에게 물러준 후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이인괄의 손자인 향단공(香壇公)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조선 중기에 지어진 살림집의 전형이라기 보다는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하나 6.25 한국전쟁으로 일부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56칸이 보존 되어 있다. 행랑채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느데 1976년에 보수할 때 위로 더 올라가 안채와 더욱 근접하게 되었다.
서백당(書白堂)
중요민속 자료 제23호
이 집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와 세조 5년(1459)지은 집이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명의 현인이 탄생 할것이라고 예언 하였는데 손소의 아들 우재 손중돈(孫仲暾)과 외손자인 희재 이언적(李彦迪)이 여기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서백당(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인(忍)를 하루 백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서백당 향나무
향나무는 본래 키가 약 23m정도 자라는 상록성 큰 키나무지 만 이 향나무는 카가 약 7m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나 옆으로 긴 가지를 뻗어 수관 폭은 약 12m에 이르며 나무가 자라는 상태도 좋은 편이다.
이 향나무의 수령은 약 600여년으로 추정되며 양민공 손소선생이 조선 세조 5년(1459년)에 양동마을에 들어와 종택 서백당을 지을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 문화재 제83호
여강 이씨 문중 서당으로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이연상(李淵祥)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 곳이다.
이 마을에서 월성 손씨 문중 서당인 안락정과 쌍벽을 이루며 조선 고종 4년(1867)경 후손들과 제자들이 지었다고 한다.
근암고택(謹唵 古宅)
중요민속 자료 제76호
이 집은 정조 4년(1780)경에 이정수(李鼎壽:1758∼1784)가 지은 것으로 그의 증손자인 근암(謹唵) 이희구
(李熙久)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마을의 어느집들과 달리 안채의 담장 밖에 따로 사랑채가 서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사랑채는 원래 안채와 직각으로 놓여 있다가 소실된 것을 20세기 초에 새로 지으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랑채의 뒤로는 비탈진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후원이 있어 마을의 전경과 주의의 자연을 감상할 있다.
수졸당(守拙堂)
중요민속 자료 제73호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1491∼1553))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潛:1576∼1655)이 지은 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사랑채는 이의잠의 6세손인 양한당 이정규가 영조 20년(1744)에 지은 것이다. 나란히 붙은 사랑채에 비해 대문채의 기단과 지붕이 낮은 것은 두 건물의 격식에 차이를 나타낸다. 비탈진 언덕이 집을 감싸고 있어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 언덕에 나무를 심고 아름답게 가꾸어 “반달동산”이라 부르며 담장을 따로 두른 사당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 자료 제73호
이 집은 손소의 쳇째 아들인 망재 손숙돈(忘齋 孫叔暾)이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병자호란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樂善堂 孫宗老: 1598∼1636)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양반가의 큰집들은 기단을 높게 쌓은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집은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다.
두곡고택(杜谷 古宅)
중요민속 자료 제77호
이 집은 영조 9년(1733년)에 이식중(李湜中:1711∼1777)이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후에 이인필의 14세 손인 두곡 이조원(杜谷 李祖源)의 소유가 된 후 후손들이 살면서 두곡 고댁이라 불렸다.
심수정
중요민속 자료 제81호
이 정자는 회재 이인적의 동생인 농재 이언괄(李彦适: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 노모를 모셨다. 여주 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ㄱ” 자로 꺽고 그 자리에 누마루를 두었다. 이렇듯 집이 바라보는 방향은 조상들이 집을 지을 때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이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중 규모가 제일 크며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마을의 서당까지 이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다. 철종때 불에 타서 1917년에 다시 지었다.
이향정(二香亭)
중요민속 문화제 제 79호
이 집은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二香亭 李範中)이 숙종 21년 1695경에 지은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안채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 쌓은 담장이 인상적인데 사랑채 앞으로도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안마당이 넓고 방앗간채가 따로 있으며 곳간이 매우 많은 점으로 미루어 집주인이 부농이었음을 짐작케한다.